• 어느 20대가 본 이승만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이념, 민주주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토착

     대한민국의 뿌리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 나라의 건국과 민주주의의 맹아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가.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시초는 어떻게 시작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대한민국 건국과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강한 국가이념에 대해 무관심한지 알 수 있는 반증이 아닐까.

    이승만 건국대통령에 대해 지금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친미주의자, 친일파’로 대표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정직하게 관찰해본다면 이승만 대통령만큼 철저하게 반일정신이 투철한 인물이 없었으며, 그가 미국의 숱한 오해와 비협조적인 태도 속에서도 민족의 독립과 독립국가 건국을 위해서 얼마나 힘썼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마치 자신의 영달을 위해 미국을 한국에 끌어들인 것처럼 여겨지는 역사관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이다. 그는 철저한 반공, 반일, 그리고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한국사회의 좌파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중들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 때문에 한국이 분단국가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어느 때 보다도 시국이 가장 혼란했던 40년대 말, 이제 막 일제식민치하에서 벗어나 미국, 러시아 등의 열강들이 다시 한국을 쟁탈하려던 당시 그가 내릴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남한만의 독립국가 건설이었다.

    물론 통일국가로의 건국이 가장 좋은 모습이었겠지만, 이미 공산주의자들로 인해 국가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정국 속에서 대한민국을 온전한 국가로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이념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다. 이승만 대통령과 같은 혜안과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민주주의를 주창하는 대한민국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에게 ‘독재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씌운 4.19 혁명을 통해 가장 잘 나타난다. 그가 학생들의 시위를 보며 ‘불의를 참지 않는 학생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는 것을 아는 국민들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킨 민주주의의 토대에서 자란 학생들이 스스로 불의한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규탄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기뻤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역시 전적으로 그의 선택이었다.

    ‘내가 하야한다면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는 것인가’라는 짧은 질문에 의해 직접 하야를 결정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물론 정권 말엽,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 있지만 그가 국민의 안위와 민주주의 수호를 가장 중요한 국가이념으로 삼은 자랑스러운 건국대통령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관은 일찌감치 깨어있었다. 1901년 옥중에서 집필한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라는 제목의 『제국 신문』논설을 보면, 나라를 부하게 만들려면 농본주의에서 벗어나 영국의 중상주의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는 해방 후의 혼란에다 6.25전쟁까지 겹쳐 국민의 대부분이 절대빈곤상태에 처한 상황이었다. 이런 참상 속에서 그가 이룬 첫 번째 성과는 미국에 약 22억의 경제원조를 요청하여 얻어낸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원조로 1955년까지 철도, 도로, 항만, 통신, 전력등 주요 사회간접자본 구축을 할 수 있었다.

    또 1954년 이후 정부로부터 귀속재산 및 기업체를 불하받은 민간인 기업가들로 하여금 수입대체산업에 투자하도록 독려하면서도 일제공산품의 수입을 억제하고 저환율정책에 근거하여 원조물자를 민간기업에 값싸게 배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입대체산업에 대해 장기, 저리의 외자대부(外資貸付)와 저금리 금융지원 그리고 세제상의 우대조치 등 여러 혜택을 베푼 결과로 1954년 이후 한국의 제조업은 11.5%의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이룬 고도성장으로 인해 60년대 제조업 수출의 활로를 열게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룬 가장 중요한 경제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은 농지개혁(農地改革)이다. 1948년 3월 귀속농지 분배작업을 계승하여 정부 수립 후 귀속농지 약 7만 정보를 분배한 다음 50년에 본격적인 농지개혁에 착수함으로써 해방 후 한국경제의 최대 현안이었던 농지개혁 사업을 완결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이 추진한 농지개혁의 골자는 비슷한 시기 북한에서 김일성이 시작한 토지개혁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보인다.

    김일성이 추진한 농지개혁은 토지에 대한 ‘경작권’을 국민에게 주고 토지와 산출물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유하는 체제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국민들에게 토지의 ‘소유권’을 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개인자산소유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독려하는 자유경쟁시장경제체제의 토대를 마련하는 업적이었다.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각 방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한국의 산업화 발전에 대한 기여였고,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 발달에 자극제 역할을 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그에 대한 무지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이것이 얼마나 큰 국익 손실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건국을 이룬 사람은 이 나라를 낳은 아버지와도 같다. 물론 그 공을 이승만이라는 한 사람에게 다 돌릴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가 대한민국에 가진 애국심과 열정 그리고 시대를 꿰뚫어보는 통찰력과 결단이 이 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나라를 이끌어갈 리더를 선출하는 때가 가까워지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조명이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리버티헤랄드www.libertyherald.co.kr/ 한여름 /대학재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