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토지개혁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성공유신체제는 민주주의 일탈이지만 사적영역 제재는 적어
  • 역사란 평가하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다. 특히 한국 현대사는 그 해석을 놓고 학계의 치열한 논쟁은 물론 언론, 한때는 ‘살아 있는 권력’마저 개입하려 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수십 년 째 풀리지 않는 과제로 꼽힌다.

    때문에 젊은 세대들은 우리 역사를 어떻게 보고 해석해야 하는가에 늘 혼돈과 의문을 가져 왔다. 우리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갖는 의문 중 일부를 추려 박효종 서울대 교수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 인터뷰를 통해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젊은이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고, 역사연구가가 젊은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어 하는 조언을 들어 봤다.

    4.3사건, 진압과정 가혹함 있었어도 본질은 남로당의 반란기도

    선진화 홍보대사(이하 <선>) 4.3 사건 당시 제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익단체나 정부 당국의 행동들이 4.3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효종 교수(이하 <박>) 제주도에서 벌어진 4.3사건은 우리 대한민국 현대사에 있어 아주 아픈 부분입니다. 해방 후의 혼란기에 남한 내에서 가장 조직을 잘 정비해두고 있었던 조직은 남로당이었고, 특히 제주도에서 남로당은 태평양 말기 일제가 제주도에 축적해 두었던 식량과 무기를 바탕으로 세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이렇듯 정부의 수립을 반대하는 남로당이 제주도에 뿌리 내리게 되자 이를 막기 위해 경찰들이 파견됩니다. 이 경찰들이 흔히 서북출신이라고 일컬어지는 극렬한 반공주의자들이었기에 제주도 내 남로당 세력과 심한 갈등을 빚게 됩니다.

    이러한 갈등상황에서 한반도 단일 정부의 수립이 불발되고 남한 내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이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었는데 제주도의 경우 특히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선거 반대 움직임이 심하였습니다.

    1948년 4월 3일을 기점으로 남로당은 유격전을 전개합니다. 사태가 악화되자 美군정은 군대를 제주도에 파견하고, 남로당이 숨어있는 산까지 들어가 진압작전을 펴게 되는데 물리력을 동반한 충돌이었기에 재산·인명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제주 4.3사건의 진압 과정에서 수반되었던 가혹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양민에 대한 학살로 보는 결과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나 참극의 원인을 따져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의 근원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공산주의 세력화를 꾀했던 남로당의 시도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진압 작전의 당위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양민들의 피해라는 작은 틀에서 제주 4.3 사건과 그 진압을 부정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균형 있게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역사적 시각일 것입니다.

    <선> 우리나라는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으로 전통적 농업국가에서 현대적 공업국가로 전환하는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는 평가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보상받은 농지보상비나 지가증권이 전쟁 기간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헐값이 되었고 농민 역시 가난한 소작농에서 자작농이 되었을 뿐이라는 비판 등 여러 한계점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남한의 토지개혁이 그래도 성공적이었나요? 북한도 토지개혁을 했다고 하는데 비교하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요?

    <박> 지주들이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부도덕하고 비효율적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소작인에게 땅을 준다는 게 토지개혁입니다.

    먼저 공산주의 국가는 기본적으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이나 재화에 대한 소유권이 개인에게는 없습니다. 북한은 무상몰수, 즉 그냥 땅을 빼앗아서 농민에게 주는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농민이 소유권이 아니라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이라 토지의 주인이 지주에서 당과 정부로 바뀐 것뿐입니다.

    우리나라는 국가가 함부로 내놔라 할 수 없는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존중하려는 의도 하에 유상몰수를 합니다. 지주들이 땅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은 사회적 정의, 공정성에 반하기 때문에 땅을 강제적으로 팔게 하고 살 수 있는 소작인들에게 사라고 했습니다.

    세계적으로 농지개혁을 성공한 나라가 얼마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필리핀, 남미인데 지주들이 소작인 부리고 있는 형태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있습니다. 농지개혁은 소유권에 대해 칼을 들이대는 것으로 가히 혁명적입니다. 이를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이승만 정부수립 후 하게 된 것이죠.

    농지개혁을 하고 나서 발발한 6.25 전쟁이 굉장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유상분배에서 몇 년 동안 상환해서 갚는다는 조건이 돈의 가치가 떨어져서 돈을 갚는 게 의미가 없어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농민에게 땅이 돌아갔기 때문에 내 땅에 대한 주인 의식이 생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지주들이 땅을 먼저 처분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급매물은 항상 쌀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정하게 큰돈을 벌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또 농지개혁이 성공적인 이유는 지주층이 땅 팔은 돈으로 기업가로서 변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농지를 통해 돈을 벌수 없는 환경이 되면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 내는데 기업가들이 중추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일부 근현대사 교과서는 토지개혁이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하는데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 기업가 계층 창출 토양 마련을 한다는 점에서 성공적입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공산당이 그냥 땅을 빼앗은 것에 불과합니다.

    1인당 소득 100달러에서 경제개발계획은 어불성설

    <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구호식량 등 원조물자가 전체 인구 식량소요량의 95%를 차지하는 등 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는 전후복구를 미국의 원조에 기댔다고 배웠습니다. 반면 우리나라의 자체적인 재건 사업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북한에 비해 자원도 없고 전후 당시 모든 게 폐허가 되었을 텐데 당시 우리 정부는 어떤 식으로 국가 재건을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박> 우리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독재와 당시 우리의 삶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가지고 있는 진실은 있지만 이승만 박사는 민족주의자였고 산업화의 초석을 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50년대 당시 국민 소득이 일인당 100 달러 미만이었기 때문에 경제발전이라는 말을 꺼내긴 어려워도 그 당시 산업화의 노력을 충분히 했습니다.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를 ‘수출 지향 산업화’라고 한다면 이승만 정부는 ‘수입 대체 산업화’를 했습니다. 당시 모든 걸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보니 소비재까지도 수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는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건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해 미국에 자원, 자료의 원조를 요구했습니다. 결국 미국과 마찰을 빚었지요. ‘수입 대체 산업’ 중 대표적인 것이 삼백산업, 즉 설탕, 밀가루, 면을 생산하는 산업입니다. 이는 꽤 많이 발전하여 수출지향 산업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교육에 대한 투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교육이 나라의 주춧돌을 놓을 만큼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국가 예산의 10% 이상을 교육에 투자했습니다. 6.25 당시에도 ‘戰時학교’를 운영해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공부만 하라고 하는 등 교육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재직 당시 초․중․고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당시 80% 정도에 달했던 문맹률을 타파하기 위해 야학에도 투자를 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사실’이라는 것들에서는 이승만 정부의 공헌이 많이 가려져 있습니다. 역사에는 비약이 없습니다. 당시 교육에 대한 투자가 확실했었기 때문에 나중에 박정희 정부 들어와서 고급 인력을 통한 산업화라는 결실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의 현저한 일탈

    <선> 60년대 사회 인프라를 구축한 다음 70년대부터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때 정치 불안정을 없애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단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유신이 독단적 선포가 아닌 선거로 이루어졌다고 하는데요. 유신 체제가 출범하기까지의 과정과 불법성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박> 유신체제는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현저한 일탈입니다. 형식상으로는 국민투표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긴 했지만 그 진행 과정에 있어 민주주의적 절차나 제도를 생략하거나 제약하는 측면이 있었고 억압 또한 수반되었던 만큼,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에 일탈한 제도라고 평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유신체제 대한 평가, 특히 유신체제를 파쇼정권으로 평가하는 일부 좌파진보진영의 시각 역시 조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했던 이탈리아·독일의 파시즘의 경우 비단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경제·사회 ·문화 등 여러 영역과 개인의 사적영역 전반에 걸친 억압을 수반했습니다. 하지만 유신체제의 경우 정치적 영역에서의 자유와 권리는 크게 제약을 받았을지언정,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제약은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유신체제를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동일 선상에 두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유신체제의 평가에 있어 민주주의 상의 문제점을 지적할 순 있지만, 이를 두고 북한의 ‘우리식 사회주의’나 파시즘 정권과 같은 체제로 평가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선> 마지막으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알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박> 한국 현대사는 60년 살아오면서 굴곡이 많았습니다. 한류가 유행하게 된 것도 그 스토리가 우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 삶의 스토리가 좋은 삶, 보람 있는 삶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현대사의 굴곡, 흠집, 고통 있었지만은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는 진정성을 가지고 돌아보면 우리 자신,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 분들의 지혜, 열정을 느끼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 진행: 선진화 홍보대사 김송이, 류혜라, 민병의, 윤지연, 장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