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랑자 ③  

     나는 돈이 없다. 그래서 윌슨의 딸 제시(Jessie Wilson)을 만났을 때 장미꽃 세송이만 사들고 갔다.
    이곳은 뉴저지에 위치한 윌슨의 시거트 별장. 윌슨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때문에 집을 비웠고 별장에는 제시 뿐이었다.

    「리, 2년 만이군요.」
    제시가 환한 웃음을 띠우면서 내가 건넨 장미꽃을 받았다.
    「난 리가 조선의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물론 농담이다. 윌슨이 사람들에게 조선 왕의 사촌으로 또는 왕의 특사라고 장난으로 소개했지만 제시는 내가 가난한 고학생인 것을 알았다.

    거실의 소파에 마주보고 앉았을 때 흑인 가정부 메리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웃는다. 메리는 나를 좋아했다. 또한 내 처지를 잘 알아서 파티가 끝나고 돌아갈 때 내프킨에 빵과 과자를 가득 싸서 주고는 했다.

    「리, 감리교 총회가 끝났으니 이제 다시 돌아갈건가요?」
    제시가 묻자 나는 머리를 저었다.
    「필라델피아에서 좀 머물겁니다.」
    「그렇죠. 「태산아」도 있으니까.」
    제시도 태산이를「태산아」로 부른다.

    커피잔을 든 내가 제시에게 물었다.
    「주지사님은 언제 오십니까?」
    윌슨은 뉴저지 주지사인 것이다.

    그러자 제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리, 여기 온 목적은 아버지군요? 그렇죠?」
    「예, 제시양.」

    따라 웃은 내가 물끄러미 이 젊은 미인 아가씨를 보았다.
    한때 제시와 내가 좋아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난 적이 있다. 소문은 대학원생들한테서 퍼져 있었는데 나는 나중에야 들었다.

    그런데 미국인 학생이나 타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그 소문에 별로 동요하지 않은 반면에 일본 유학생들은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내가 떠났더니 곧 잠잠해진 모양이다.

    그때 제시가 머리를 들고 나를 보았다. 어느덧 정색한 얼굴이다.
    「리, 그렇다면 나하고 친해진 것도 모두 아버지 때문인가요?」
    「그건 아냐, 제시양.」

    머리를 저은 나도 똑바로 제시를 보았다. 이렇게 아름답고 집안까지 좋은 여인을 애인으로 갖는다는 것은 모든 남자의 꿈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분수를 벗어날 수가 없다.

    이곳까지 오는데도 교회에서 강연을 한 성금을 몇불씩 모아 차비를 만들었다. 동정심이 남녀관계를 유지시켜주지 못한다는 현실도 겪어왔다.

    내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는 조선의 미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이시오. 제시양.」
    「그래서 내가 이용당한 건가요?」
    「당신을 좋아했지만 당신은 내 현실과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공주였지.」
    한마디씩 또박또박 말한 내가 제시의 시선을 받고는 웃었다.
    「공주하고 함께 있는 동안은 내가 왕자가 된 느낌이 들었고.」

    이제 제시는 바라만 보았고 나는 말을 이었다.
    「당신과 헤어지면 나는 주방 뒷문으로 가서 메리한테 빵과 과자를 싼 내프킨을 받아들고 숙소로 갑니다. 어느 날은 케이크가 들어있어서 가슴이 뛰기도 했지요.」
    「......」
    「그때는 꿈이 깨고 현실로 돌아오지요. 그렇게 제시, 당신을 만난겁니다.」
    「메리 아줌마가 챙겨 주었어요?」
    그렇게 묻는 제시의 목소리가 떨렸으므로 내 가슴이 메었다.

    외면한 나에게 제시의 말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이달 말쯤 돌아오실거예요. 제가 말씀드려 놓을테니까 그때 다시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