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20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른 후 국제무대에서의 우리 위상에 뿌듯해하는 국민이 많지만 여전히 서양에 대한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 얼마 전 수업시간에 "축구가 영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데 맞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유럽보다 동양이 앞섰다는 사실에서 긍지를 찾으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공 비슷한 것을 만들어 발로 차면서 노는 게임이 있었다. 영국인들은 중세 때부터 돼지 등 동물의 방광으로 공을 만들어 즐겼는데 초기엔 규칙도 없었고 공보다 상대방의 정강이를 차는 경우가 더 많을 정도로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그러다 19세기 중반에 최초로 게임의 규칙을 만들어 체계화했고 그 때문에 영국이 축구의 종주국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근대 이후 유럽이 세계를 제패한 사실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소위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펴왔다. 즉 유럽인들이 그동안 역사를 자기들 입맛대로 해석하면서 비(非)유럽 세계를 멸시하고 지배를 정당화했는데 그것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중국이 종이와 나침반 등을 최초로 발명했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유럽보다 더 부강했다고 주장하면서 유럽의 세계 제패를 단순히 운으로 돌리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로는 유럽이 어떤 강점으로 세상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를 파악할 수 없고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 경우에도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를 내세우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물론 그 사실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만든 금속활자로 무엇을 했는지이다. 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인쇄술은 유럽에서 지식을 사회 저변으로 퍼뜨리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함으로써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금속활자는 불경을 만드는 데 그쳤을 뿐 사회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시작했나가 아니라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지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식의 자부심이 '과잉' 민족주의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지지리도 못살 때엔 잘난 점을 부각시켜 긍지를 잃지 않는 게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부족한 점을 진솔하게 인정하고 고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 예로 왜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우리 책임을 밝히는 데 너무 게을렀다. 그저 사악한 일제(日帝)만 비난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의 치부를 과감히 드러내고 교훈을 얻으려는 태도가 필요하며 그를 위해선 과잉 민족주의가 곡해해온 역사적 사실도 밝혀야 한다. 대표적으로 잘못 치장된 인물이 고종의 왕비 민씨다. TV 드라마와 뮤지컬로까지 만들어져 구국의 여왕으로 추앙되었지만 그녀는 실상 '나라'가 아니라 왕실과 민씨 가문을 지키는 데 몰두했을 뿐이다. 어느 연구자는 민 왕후가 칭송받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 덕분이라고 말한다. 망국의 책임을 밝힌다는 차원에서도 이런 주장들에 대한 솔직한 토론과 반성이 필요하다.

    김정은의 3대째 세습조차 기꺼이 받아들이는 종북주의야말로 잘못된 민족주의의 압권이다. 종북주의자들의 일부는 옛 이념을 버리지 못한 주사파겠지만 일부는 민족지상주의자를 자처한다. 그러나 인간의 권리와 행복이라는 근본 가치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이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사파건, 공산주의건, 과잉 민족주의건 주객(主客)이 전도된 잘못된 이념은 사라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역사는 우리에게 똑똑히 가르쳐준다.

    한국에서 가르치고 있는 어느 미국인 교수는 우리가 이룬 대단한 업적은 '한(韓)민족'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성취한 것이라고 옳게 지적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번영과 위상은 우리의 민족적 자질 덕분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남쪽에 거주해온 대한민국 국민이 건국 후 피땀 흘려 이루어낸 것이라는 말이다. 한민족과 대한민국 국민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파악한 그의 통찰력이 놀랍다.

    우리는 이제 '본질적 민족성'을 핵심으로 하는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동일한 가치관과 목표를 가지고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민족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북녘의 동포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조국이 될 날이 앞당겨질 것이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