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파트로 들어선 고수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오후 4시 반,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온 셈이다.
    뒤쪽에 있던 서미정이 목을 늘이고 거실을 본다.

    거실 소파에 윤대현이 앉아있는 것이다. 그냥 앉아있는 것이 아니다. 외출복 차림으로 옆에는 커다란 가방 두 개가 놓여져 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그때 머리를 든 윤대현이 시선을 고수연과 서미정 가운데다 두고 말했다.
    「야, 일루 와바. 나가기 전에 할 말 있으니까.」

    그러자 서미정이 먼저 윤대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고수연이 뒤를 따른다.

    서미정과 고수연이 소파 뒤쪽에 나란히 섰을 때 윤대현이 말했다.
    「나, 오늘부터 열흘간 나가 있을 거다.」

    윤대현이 역시 서미정과 고수연 사이의 틈을 노려본 채 말을 잇는다.
    「글타고 오해하지마. 내가 이 분위기를 피해가는 것이 아니니까 말야. 난 열흘 동안 합숙을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래서 그러니깐.」
    「오빠, 무슨 합숙인데요?」
    하고 물었던 서미정이 옆에서 고수연이 발길로 종아리를 차는 바람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허리 아래쪽은 소파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때 다시 윤대현이 말을 이었다.
    「그건 몰라도 되고, 에, 또.」
    하면서 윤대현이 주머니를 뒤져 접혀진 쪽지를 꺼내 탁자 위에다 놓았다.

    「우리가 주문한 쌀이 오는 날. 정수기 에이에스 오는 날. 관리소 점검 오는 날이 적혀 있으니까 이걸 보고 받아. 글고.」

    자리에서 일어선 윤대현이 이제는 똑바로 고수연을 보았다.
    「내가 아버지한테도 이야기 했으니까 말야.」

    「걱정말고 다녀와요, 오빠.」
    하고 서미정이 말했으므로 윤대현은 가방을 쥐었다.

    서미정은 현관 앞까지 윤대현을 배웅했지만 고수연은 바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어딜 간 걸까?」
    고수연이 욕실에서 손만 씻고 이제 거실로 나왔더니 리모컨 버튼을 누르고 있던 서미정이 건성으로 묻는다.

    고수연이 잠자코 앞자리에 앉았더니 서미정이 비디오 버튼을 마구 누르면서 투덜거렸다.
    「테이프 다 뺐나봐. 게임 테이프나 넣어두고 가지.」
    「그만좀 해.」
    「니가 안먹는 떡, 내가 대신 먹자.」

    리모컨을 집어던진 서미정이 고수연을 보았다. TV 화면은 다시 꺼졌다.

    「근데 무슨 합숙을 하는 걸까?」
    「내가 알어?」
    「뭐, 다이어트 같은  거?」
    그랬다가 서미정이 제 말에 제가 대답했다.
    「그럴리는 없고, 고시 공부? 아냐.」

    그때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둘은 깜짝 놀랐다. 집 전화가 울리고 있는 것이다. 벨소리가 다섯 번째 울렸을 때 마침내 서미정이 턱으로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니가 받어. 쌀 가져왔나봐.」
    「오늘 아닐꺼야.」
    아직도 탁자 위에 놓인 쪽지를 노려보며 고수연이 말했다.

    「너네 집이니까 니가 받아.」
    이맛살을 찌푸린 서미정이 다시 말했으므로 고수연은 송수화기를 들어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아, 거기 윤대현이 집이죠?」
    하고 초조한 분위기로 여자가 물었으므로 고수연이 송수화기를 귀에서 조금 떼었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