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회담, 속죄 모르는 일본 구보타 망언으로 원점에이승만, '평화선' 대항...'일본 우선' 美정책 저항'키워놓은 파이' 14년뒤 '과거청산'없이 개발밑천으로
  • 근대화 착수금은 이승만이 만들었다

    - 한일회담 이야기

    두 이웃이 살고 있었다. 세태에 바람이 일어나 한 이웃이 다른 이웃을 덮쳐 깔고 앉는 일이 벌어졌다. 세태가 요동쳐 다시 각기 제 집 차지하고 사는 세상이 되었다.

     동네가 두 이웃에게 화해를 권했다. 수교(修交)의 테이블에 앉았는데, 깔고 앉았던 이웃에게 죄의식이 없었다. 문화로 굳은 심상에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만 흘렀고, 대화는 마음의 접점을 얻지 못했다.
      동네의 성화에 못 이겨 수교테이블에서 두 이웃이 만들어 낸 것은 현실의 수수(授受)관계였다. 그것으로 화해의 외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죄의식을 거부하는 가해자 이웃의 외교승리였다. 무반성을 관철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는 피해자와 함께 미래의 문을 열어 줄 과거 청산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일회담은 사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측과 죄의식 자체를 갖지 않는 측과의 대화였다.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는 불가능했다. 회담 타결에 14년(1951년 10월 20일~1965년 6월 22일) 걸렸다.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던 일본은 미국과 강화, 독립(1952년 4월 28일)을 앞두고 있었고,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 독립했던 한국은 6·25 전쟁 중이었다.

    양측이 첫 예비회담을 한 곳은 일본 도쿄(東京)의 연합군총사령부(GHQ) 외교국의 회의실이었고, GHQ 외교국장 시볼트가 옵서버로 참석했다.

    이 모양이 회담성격의 많은 것을 얘기하고 있다. 

    회담은 반도에서의 전쟁 수행에서 한국과 일본의 결연을 강력히 필요로 하는 미국의 알선으로 시작된 것이다. 결렬과 재개를 7차에 걸쳐 되풀이한 회담의 각 요목에는 미국의 압력이 있었다. 미(美) 국무성의 과장급 이상 차관보들은 물론이고 한·일 주재대사,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덜레스, 딘 러스크 국무장관, 위로는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대통령 등이 한일 정상을 향해 각각 직접으로 압력을 가하고 독려했던 것이 한참 시간이 가서, 기록이 공개되어 알게 되었다.


    한일회담은 이승만의 ‘제2의 독립투쟁’

     한일회담은 이승만(李承晩)의 ‘제2의 독립투쟁’이었다.
    상대편에 식민지배의 죄의식이 없는 일본과, 그를 편드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공업력에 주목하여 아시아의 반공(反共) 보루 센터를 일본에 만들고자 하였다.
    미국 원조로 예산편성이 가능했던 나라 한국은 아예 서툰 공업 같은 것은 할 것 없이 일본의 소비재 시장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 미국의 큰 그림이었다.
    수교회담을 통한 한일(韓日) 결연은 미국의 이 그림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미국 등에 업혀 있다시피 했던 신생 한국에서 미국의 정책에 맞서 자립적 공업의 싹을 틔워 보려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피나는 투쟁을 포착해 낸 것은 1970년대 학번인 이종원(李鍾元, <東アジア冷戰と韓美日關係>, 東京大學出版会)이었다.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승만은 끝내 미국으로부터 장기개발계획의 양해를 얻어 내고 1959년 봄에는 국무회의에 한국 생기고서 처음으로, 1960년부터 시작하는 3개년짜리 장기개발계획을 제출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원조는 줄어들기 시작했으므로 문제는 개발계획의 재원이었다. 미국은 한일 간의 경제관계 형성 강화가 미국의 짐을 대신해 주기를 바랐으나, 미국 앞에는 늘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정책의 벽이 있었다.

    한일회담의 가장 어려운 고비는 일본이 식민지 과거문제를 두고서 취한 자세와 함께 닥쳐왔다. 일본은 그동안 식민지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개인재산에 대해서는 일본도 청구권이 있다고, 이른바 역(逆)청구권을 주장하고 나왔는데 한국측은 강하게 반발했다.

     여기다가 1953년 10월의 제3차회담에서는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久保田貫一郞)가 식민지 때 일본은 조선에서 ‘철도 항구를 만들거나 농지를 조성하는 등 …’이라면서 식민지 시혜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역사에 유명한 ‘구보다 망언’인데, 일본측은 한국측의 철회요구를 거부했다. 한국측은 구보다 발언이 한일회담의 기초를 완전히 망가트렸다고 선언하고, 회담을 완벽하게 결렬시켜 버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내락이 있은 것은 물론이다.

    회담에 숨구멍이 트인 것은 1957년 아시아 정치에 야심이 있는 기시(岸信介) 정권이 등장하여, 예비교섭에서 구보다 발언을 철회하고 일본의 역청구권 포기를 합의하고 나서이다.


    이승만, “미국의 대한원조는 일본 위한 것”
      그때까지가 치자(治者) 이승만의 가장 피나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위중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이 1953년 10월 1일 있었는데, 10월 15일에 구보다 발언이 있어 한일회담은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일본측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면서, 회담에 고압적으로 나오는 일본의 배경에 미국의 일본 중시 정책이 있다고 읽었다. 6·25의 잿더미에서 이제 막 헤어나려는 한국에 주어진 미국의 부흥원조의 물자조달처는, 어디까지나 일본이어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확고한 입장이었다.
    낚싯바늘이라도 하나 만들 공장 짓기를 원하는 이승만은 이 미국의 정책에 저항했다.

    1954년 2월 4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에게 미국의 일본중시정책을 격렬히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치자가 작성한 정책문서 치고 이렇게 감동적인 것을 본 적이 없다. 스스로의 모든 것을 국익 앞에 던지고 사는 이승만의 치열함이 오늘에도 뭔가 교훈이 있을 것 같아 그대로 옮겨 보겠다.

    “종래의 미국의 대한(對韓) 경제원조는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경제를 위해서 쓰여져 왔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몇 가지 견문한 사실 적시를 하고서)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미국은 ‘한국경제의 재건과 부흥을 위하여’ 한국에 원조를 주는 대신에, 모든 원조를 일본에 직접 건네주는 쪽이 좋다. ‘한국경제의 재건과 부흥을 위해’란 이름뿐인 것에 불과하고 실제의 원조는 일본재건을 위해 쓰였기 때문이다. 

     최후로 이 같은 상황하에서는, 우리는 이 이상 미국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이대로 미국에 협력해 가면, 한국은 또 하나의 중국(중공)이 되든지, 그렇지 않다면 여태까지의 식민지 조선으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다. (공산주의와 일본이라는) 두 개의 적에 팔려 넘어가기보다는, 우리 민족이 통일될 때까지 싸우는 쪽을 택해야 할 것이다.” (이종원, 위에 든책) 

    마지막의 ‘통일될 때까지…’는 불과 반 년 전 쯤에 맺어진 휴전협정 파기와 단독북진론을 비치고 있는 것이다.

     양유찬(梁裕燦) 주미대사가 들고 온 이승만의 편지를 검토한 로버트슨 국무차관보는 내용에 겁이 나서 양 대사에게 사정하여 도로 가져가게 했다. 그러나 내용이야 어떻게 국무성이 대통령에게 보고 안할 수 있었겠는가.


  • ▲ 1954년8월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백악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일방적 압력에 강력히 저항, 회담은 깨졌다.
    ▲ 1954년8월 미국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아이젠하워 대통령 부부(백악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일방적 압력에 강력히 저항, 회담은 깨졌다.

    이승만-아이젠하워 회담의 결렬

     한국측이 한일회담에서 죄의식 없는 일본으로 하여금, 대안적 방식으로라도 과거를 속죄하는 쪽으로 행동케 하는 유일한 압력카드는 이승만이 설정한 평화선이었다. 구보다 발언으로 회담이 결렬되자, 한국은 즉각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 나포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일본 조야(朝野)의 여론이 끓었고, 일본정부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휴전한 지 1년 정도라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비준문제 등 한미 간에 공동의 현안이 많았다. 미 국무성은 1954년 7월 말로 이승만의 방미와 아이젠하워와의 회담을 세트했다. 결렬된 한일회담을 두고 이승만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사람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밖에 없다고 보았던 모양이다.

     이때에 한일관계에 대해 국무성 극동국 전체의 일치된 견해는 “미국으로서는 이 이상 한일 양국 간의 험악한 관계를 방치 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명확히 인상주는 것이 요청됨”이었다.

    이(李)-아이젠하워 정상회담은 모두 4회에 걸쳐 예정되어 있었다. 7월 29일의 세 번째 회담의 주제가 한일관계였다. 회담 모두에서 배석했던 덜레스 국무장관은 “한일관계의 정상화야말로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서두를 끄집어내고서는, “한국의 안정보장과 경제 발전을 위해 반일정책을 포기할 것”을 이승만에게 다잡았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일본측이 식민지배에 대해 죄책감이 없이 오히려 시혜자 같은 입장을 취한다”고 비난했고, “화해의 기반을 파괴하여 회담을 망가트리는 것은 오히려 일본쪽”이라고, 눈앞의 아이젠하워, 덜레스의 압력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일본이 ‘조금도 달라짐이 없이 한국을 그동안의 식민지로 취급하는’ 고압적인 자세를 못 버리고 있다고 맹렬히 공박했지만, 미국측은 수긍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평화선 같은 것 철폐하고, 구보다 발언도 문제 삼을 것 없이 빨리 회담을 재개하여, 관계를 정상화하고 일본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하라가 미국측의 바람이었겠지만, 이승만은 응할 수 없었다. 

    과거청산 없는 한일관계를 이승만은 생각할 수 없었다.
    미국측은 한시라도 빨리 한국을 일본경제에 줄 세우는 것이 급했다. 정상회담의 양측 주장은 마지막까지 평행선이었다.
     끝내는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의 완고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한숨 돌려 회담이 재개되었는데, 이번에는 이승만이 소신을 밝히는 장광설을 유창한 영어로 늘어놓고는 퇴장해 버렸다. 그러고는 일정을 당겨 귀국해버렸던 것이다.
    이승만은 맞수를 두었고 한일회담을 두고서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는 가장 강한 압력을 걷어차 버린 것이다.

    이승만, 산업화의 착수금을 만들다

     1953년 10월에 한일회담이 결렬되고서, 예비교섭에서 양측이 다시 얼굴을 맞대는 것은 1957년 6월이었다.

     그 4년 동안에 일본에는 정권이 3번 바뀌었다. 원조의 제공과 한일회담 재개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으로, 미국원조가 생명줄 같은 나라의 대통령 이승만은 시달려야 했다. 거기다가 대일(對日) 조달을 거부하려고 들었으니, 이승만과 나라는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승만은 회담을 재개하자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구보다 망언 결렬로부터 4년이 지나, 기시(岸) 정권이 등장하여 있게 된 예비교섭에서 결국 일본측이 물러섰다. 일본은 구보다 발언의 철회와 역청구권 포기에 합의함으로써 1958년 4월 15일 제4차 한일회담의 문을 연 것이다.
     1958년 단계에서 이승만은 장기개발계획으로 공업화의 전망을 열어 가고 있었던지라, 경제관계로 한일회담을 풀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은 1959년 재일동포를 김일성(金日成) 치하의 북으로 보내는 북송(北送)을 시작했다. 한일회담은 다시 암초에 부딪혔다. 1960년, 4·19가 왔고,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했다.

    장면(張勉) 정권, 박정희(朴正熙) 정권으로 회담은 제7차까지 있었다. 막판에는 일본을 끌고가고 있는 오노 반복(大野伴睦) 등 집권 자민당의 보수(保守) 본류가 한국측의 반대여론으로 주춤거리던, 회담의 추진력이 되었다. 미국의 풍향도 바뀌어 있었다. 1961년 방미(訪美)한 일본수상 이케다(池田)에게 케네디 대통령은 한일회담에서 일본이 양보할 것과 일본의 이니셔티브를 강조하는 톤으로 변해 있었다.(高崎宗司, <檢證 日韓會談>, 岩波新書) 타결되어 한일협정이 조인된 것은 1965년 6월 22일이었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높이 날아올라 14년 간에 걸친 한일 간의 수작을 내려다보면 어떤 모양일까.

     이승만이 ‘과거청산위의 수교’라는 원칙을 평화선(일명 이승만라인) 카드로 지킴으로써 파이는 커졌다. 이 파이를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자금과 바꿈으로써 회담은 마무리되었다.

     한국 산업화의 착수금은 이승만이 만들어 주었다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역사에서 뭔가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견지되어야 할 자세일 것이다.

    일본은 ‘과거청산’과 평화선을 돈으로 산 것이다. 한국과의 과거에서 해방되었다는 짧은 시간의 착각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기실 일본은 그때 한창 고도성장하던 때의 돈 힘 믿었다가, 그들도 백년의 장계에는 불가결할 ‘과거청산’의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국화(菊花)와 칼>과 日本人

     <국화(菊花)와 칼>은 일본인론(論)의 고전(古典)이다. 서양사람들이 단 한 권만 읽고 일본을 알려고 들었을 때, 반드시 권해지는 책이 이 책이다. 한국말로도 번역(루스 베네딕트 저, 김윤식·오인석 역, 을유문화사)되어 있다. 

     저자 루스 베네딕트(1887~1948년)는 여성 문화인류학자이다. 미국서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유럽에 유학한 적이 있고, 돌아와서는 캘리포니아의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영어를 가르쳤다. 젊은 날의 그녀는 휴머니스트였고, 평화주의자였다. 현대전쟁의 바보스러움과 국가라는 권력 현상 자체를 격렬하게 공격하기도 했다.

     그녀가 문화인류학자로 대성하는 것은 32살에 다시 컬럼비아 대학에 입학하여, 세계문화인류학의 태두로서 위대하다는 말을 듣는 프란츠 보아즈 교수의 직접 지도를 받고 나서이다. 보아즈가 대학을 은퇴한 다음에는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국화와 칼>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전쟁정보국의 위탁연구에서 나온 저작이다. 전쟁을 거드는 연구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파시즘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고서, 무조건 항복한 일본을 향해 천황제를 존속시키고,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해 주고, 일본의 정부 기구 인원을 모두 살려, GHQ의 손발로 하여 점령정책을 시행하고, 강화조약에서 징벌조항을 배제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 모든 미국의 대일시책이 문화인류학의 저작 <국화와 칼>에 드러나 있는 루스베네딕트의 연구 결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녀의 연구는 구체적인 전쟁상황에 직접적으로 답할 수 있는 것이라야 했다. 

     ‘중대 국면이 꼬리를 물고 속속 우리 눈앞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일본인은 어떻게 행동할까. 일본 본토에 진공(進攻)함이 없이 항복시키는 게 가능할 것인가. 우리(미국)는 황궁에 폭격을 해야 할 것인가. 일본 포로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 군대 및 일본 본토에 대한 선전에서 어떤 말을 해야, 아메리카인의 생명을 건지고, 최후의 일인까지 항전하겠다는 일본인의 결의를 약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국화와 칼>)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의 공효를 높이 드러내 보인 <국화와 칼>은 번역 출판된 지 6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일본에서 스테디셀러로 되어 있다.

     한일회담을 보았던 우리도 <국화와 칼>에서 뭔가 답을 얻어 내고자 한다. 우리는 서두에서 일본사람들이 이웃나라를 뺏고 식민지배를 한 일에 대해, 관계 재정립의 마당에서도 죄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처럼 죄의식을 갖기 어려운 사람들인가. 그 답을 한번 <국화와 칼>에서 얻어 보고자 한다. 


    일본여인과 중국여인

     베네딕트는 미국에 유학하여, 얼마쯤 그대로 눌러앉아 산 한 일본여인의 자서전 <나의 좁은 섬나라>에서, 이 일본여인이 미국에서 알게 된 일본처녀들과 중국처녀들을 비교 대조해 놓은 평언을 인용해 놓았다. 이 인용을 통해 베네딕트는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서도 일치된다고 느껴지는 일본사람들의 사람됨의 특징적인 면모를 드러내 보이려 한 것 같다.

     “중국의 처녀들은 대개의 일본처녀들에게서는 전혀 볼 수 없는 차분함과 사교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상류(上流)의 중국 여인들은, 지상에서 가장 때깔이 빠져있는 사람들로 내겐 보였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왕족의 존엄과도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있어서 세계의 진정한 지배자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이 거창한 기계문명, 스피드문명 속에 있으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그녀들의 겁먹지 않은 태도와 빼어나게 침착한 몸짓은, 우리들 일본 아가씨들의 끊임없이 겁에 질린 것 같은, 과도하게 신경질적인 태도와 현격한 대조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것은 이 같은 현상의 사회적 배경에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터이다.”

     베네딕트는 이 인용에 앞서, 미국생활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일본사람들이 중국 사람들보다 훨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일상적 행동에 있어서 보편적인 상황에 두루 적용되는 행동 규준을 내면에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지켜야 할 외면적 규칙(掟-오키테)을 일일이 습득하여, 거기에 맞게 행동함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복잡한 오키테(외면적 준수규칙)가 요구되지 않는 미국 같은 사회에 일본인이 놓여지면, 일본인은 어리둥절해하고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베네딕트의 결론은 일본인은 그 내면의 도덕에 있어서의 절대적 기준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누구라도 죄를 범했다고 느낄 만한 행위를 했을 경우에도, 내심에 기준이 없으므로 일본인들의 경우에는 번민이 그렇게 깊기 어렵다는 것이다. 


    ‘죄의 문화’와 ‘부끄러움의 문화’

     <국화와 칼>은 문화를 ‘죄(罪)의 문화’(guilt culture)와 ‘부끄러움의 문화’(shame culture)로 구분하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베네딕트는 도덕의 절대적인 표준이 설해지고, 양심의 함양에 의지하는 사회를 죄의 문화라고 정의한다. 일본에 흔히 있는 ‘만일에 세간(世間)이 없다면, 자중하지 않아도 될 텐데’라는 속언을 들어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이 귀하게 여기는 ‘자중’이라는 것 자체가 외면적 강제력에 의존함을 지적하고 있다. 즉 일본인은 죄의 중대함보다는 부끄럼(恥·하지)의 중대함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부끄럼이 주요한 강제력이 되어 있는 ‘부끄러움의 문화’(shame culture)에서는 나쁜 짓이 ‘세인(世人)의 앞에 드러나지’ 않는 한 걱정 고민할 필요는 없는 것으로서, 고백은 오히려 고통을 사는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같은) 부끄러움의 문화에서는 인간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신(神)에 대해서까지도 고백하는 습관은 없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에 행운을 기원하는 의식은 있어도 속죄의 의식은 없다고 베네딕트는 잘라서 지적하고 있다.

    루스 베네딕트를 이 정도 따라오면, 일본사람들이 우리의 관심사항인 한일회담에서 왜 그리도 과거사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속죄행을 거부하려고 들었는지 그 문화의 뿌리를 짐작할 만한 데까지 왔다.

     베네딕트 자신은 ‘죄의 문화’와 ‘부끄러움의 문화’에 진화론적 서열을 두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부끄러움의 문화’일지라도, 그 사회의 인문적 조건이 발달하여, 도덕의 궁극적 원리에 대한 인지(認知)능력이 높아지고, 다수(多數)에 의한 내적 공유가 넓어진다면, 부끄러움의 문화는 죄의 문화로 이행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나의 예를 찾아본다.

     한일회담에서는 재일동포들의 영주(永住) 허가범위를 놓고서도 실랑이를 벌였다. 최종적으로는 전전(戰前)부터 거주하는 한국인의 자손까지라는 한국측의 주장을 일본측이 상당히 수용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 가(假)조인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의 퀄리티 페이퍼<아사히(朝日)신문>(1965년 3월 31일)이 다음과 같은 사설을 실었다.(高崎宗司)

     “자손의 대(代)에서까지 영주가 보장되어, 거기다가 그처럼 광범위하게 내국민 대우를 확보해 준다면, 장래 이 좁은 국토 속에서, 색다르고도 해결 곤란한 소수(少數)민족 문제를 끌어안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때 아사히 신문이 대표하려고 들었던 일본인의 심성은, 한일회담과 관련하여 과거청산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이 없고, 반도를 깔고 앉고서는 만주로 중국으로 밥그릇 키우기에만 영악했던 제국관료의 심성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으로 느껴진다. 


    원칙이 없는 일본 사회

     그러고서 세월이 흘러,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하고, 동서냉전이 끝났을 때인 1992년 7월 8일의 <아사히신문>은 <‘과거의 극복’에 맞붙을 때>라는 제목의 사설 서두에서 “무겁고 괴로운 문제이다. 그러다 이를 직시하여 사죄의 길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에 대한 우리들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望田幸男, <戰爭責任·前後責任>, 朝日選書, 東京)라고 썼다. 과거문제에 대한 아사히의 태도가 한일회담이 타결되던 1960년대 중반과는 질적으로 달라져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원래 ‘죄의 문화’, ‘부끄러움의 문화’같은 이른바 ‘문화의 틀(型)’은 100년, 200년으로 쉬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30년의 시간 폭을 두고 <아사히신문>의 논조에서 드러난 질적변화는 일본사회의 문화가 ‘부끄러움의 문화’에서 ‘죄의 문화’로 이행하는 싹이 튼 것이라 볼 수는 없을까.

     아사히 사설을 인용한 모치다(望田)는 ‘과거의 극복’을 풀이하여, 일본이 과거 아시아의 여러나라 사람들에게 저지른 침략과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말하는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이 말에는 ‘도의적 정신적 자세’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죄의 문화’로의 이행에까지 기대를 걸면서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일본이 한시라도 빨리 ‘과거’에서 빠져나와, 오는 백년 한국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라서이다. 일본인들 어찌 오늘의 동아(東亞)의 형국에 생각이 미치지 않을 것인가.

     루스 베네딕트가 일본사회에 관해 가르쳐 주는 핵심적인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사회·인간구조는 상하계층질서가 자연이라는 것, 또 하나는 ‘죄’의 사회가 아니고 ‘부끄러움’의 사회인 일본사회에는 원칙이라는 것은 무엇하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을 바꾼 패전

     이 두가지 가르침을 식민지배에 대한 죄의식과 연관하여 풀어 보면, ‘대동아(大東亞)공영권’에서 일본은 형이고 조선이 동생인 것은 일본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자연이다. 식민지배란 형이 동생에게 당연히 베푸는 은혜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세계관을 바꿀 외면적 강제력이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있지 않았다.

     ‘부끄러움’의 사회 일본은 어떤 외부의 강제력이 없이는 절대로 잘못했다 소리는 나올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도덕적 궁극원리가 속에 없는데, 내성(內省)이나 반성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식민지배에 대한 죄의식도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적 자각하고는 무연한 사람들한테, 사죄의 자세를 요구하는 한일회담을 했으니 그 일이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가.

     두 가지 접근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의 방법인 일본사회의 ‘죄의 문화’로의 이행은 앞에서 보았다. 또 하나는 외면적인 강제력이다. 일본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천황이 항복하자마자 여태까지 귀신 짐승처럼 여기고 최후의 한 사람까지 죽창으로라도 다 찔러 죽이겠다고 하던 미국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순종의 대상으로 삼아 버렸다.

     일본사람의 행동윤리가 기회주의적이라고 루스 베네딕트가 단정하는 가장 중심적인 현상이 바로 이것이다.

     ‘부끄러움의 문화’형의 일본사람들을 하루아침에 바꾼 것은 패전(敗戰)이었다. 패전은 전(全)세계의 눈앞에서 부끄럼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패전만이 일본인의 행동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꿔 줬다고 베네딕트는 알려 주고 있다.

     일본 같은 ‘부끄러움’ 사회 옆에서 선린(善隣)으로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된다. 루스 베네딕트의 가르침대로 전쟁 한 번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내려가지 말아야 할 것이고, 늘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사회의 윤리적 진화를 믿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