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광욕을 형무소에서 처음 한 날로부터 며칠 후, 내친김에 구 중위에게 또 하나의 어려운 요청을 하기로 했다. 그것은 하이탑 장군의 병에 관한 문제였다. 내 병도 문제지만, 하이탑 장군의 호흡기 질환은 옆에서 보기가 참으로 딱했다. 그래서 나는 하이탑 장군의 병을 걱정했고, 하이탑 장군은 병색을 띠고 시들어가는 내 몸을 걱정해 주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하이탑 장군은 5개월 전 다른 곳에서 이곳 치화형무소로 이감되어 온 이후, 내 감방에서 함께 지냈다. A동 4층은 격리감방이므로 한방에 한명씩 수감하는데, 정치 중범자들이 무더기로 잡혀오는 바람에 한방에 두명 이상 빽빽하게 수감하는 일도 있었다.

    하이탑 장군의 본 이름은 짠우바이(陳友七)였다. 1926년생이며 키는 1미터 68센티이고, 월남인 치고는 풍채가 당당한 기골의 사나이였다. 학력이라고는 초등학교 1학년에 26일간 다닌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독학으로 글을 익히고 머리가 좋아 와하우교 군총사령관을 지내면서, 1964년 초 와하우교 군이 남월 정규군과 통합 될 때 남월정규군 육군소장에 임명된 입지 전적인 인물이었다.

    하이탑은 항불(抗佛) 투쟁을 할 때와, 반(反) 고딘디엠 투쟁을 할 때 지하 활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짠우바이라는 본 이름을 쓰지 않고 여러개의 비밀 이름을 사용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하이탑이었다. 그는 하이탑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 하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때부터 월남사람들은 본명은 잊어버리고 그를 하이탑 장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비범한 사나이도 프랑스 식민시대에 체포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고, 고딘디엠 정권때도 체포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는 비운을 겪었다.

    그가 내 감방으로 이감되어온 1976년 2월 12일, 그는 심상치 않은 기침을 자주했다. 잔기침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눈은 푹 꺼져 들어가고 가슴 뼈와 어깨 뼈는 앙상하게 드러났다. 폐암이나 악성 만성기관지염이 아닌가 싶었다.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경비원을 통해 여러 간수들에게 탄원했으나, A동 수감자가 그런 병으로 의사의 진단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일이어서 이때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었다.

    하이탑 장군은 장탄식을 하면서, 우리들은 인권 불모지대의 적대(敵對) 계층으로 분류되어 노예만도 못하니 기가 막힌다면서 “싸우람, 쨋로이(=더럽다, 이젠 죽은 몸이다)”를 연발했다. A동, B동, D동 수감자들은 격리 수용된 중범자들이므로, 그 지역을 떠나서 의사의 진찰을 받을 수가 없었다. A동 수감자가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면 의사가 수감자의 감방으로 와야 한다. 1976년 8월 2일 오전 9시경, 간수 구 중위는 위생(衛生) 소위 한 명, 여의사 한 명, 여간호사 한 명, 경비원 두 명과, 남자 간호원(=활동죄수) 한 명을 인솔하고 A동 4층 2호 감방의 밀폐된 철문을 열었다. 감방이 비좁아서 경비원 두 명과 남자 간호원은 철문 밖에 서 있고, 나머지는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의사는 28~29세쯤 되는 중국계 베트남 인으로 보였다. 얼굴에는 주근깨가 꽤 있었으나 온순한 인상이었다. 미인은 아니었지만 오래간만에 보는 여성이라 하늘에서 갓 내려온 성스러운 선녀처럼 보였으며, 기다란 흰 가운은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의 날개 옷처럼 보였다. 여 간호사는 베트남 전통의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몸매는 좀 뚱뚱한 편이지만 얼굴은 여의사 보다 예뻤고, 흰 가운은 여의사의 긴가운 보다 훨씬 짧은 반(半) 길이로 풍만한 그녀의 엉덩이를 덮고 있었다.

    여의사는 하이탑 장군의 앙상한 갈빗대 위에 청진기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조용히 진찰하다가, 다음에는 등에다 청진기를 댔다. 그 다음에는 하이탑 장군을 거적때기 돗자리 위에 눕게 한 후, 배와 가슴을 이리저리 주물러 보았다. 그 후 입을 벌리게 하여 목구멍도 들여다보고 다리와 발등을 꾹꾹 눌러보기도 한 후, 혈압을 재더니 베트말로 무슨 이야기인가를 했다. 후에 알고보니, 폐가 나쁜데다 각기병도 있다고 한 것이다. 하이탑 장군에 대한 진찰이 끝나자 여의사는 구 중위와 위생 소위와 몇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더니 감방을 나서려고 했다.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신박시, 또이(=의사 선생님, 나도 봐주시지요)”하면서 내 귀와 목과 가슴과 발을 손으로 가리켰다.

    청진기를 손에 든 선녀는 간수 구 중위를 바라보며 베트남 말로 몇 마디 건네더니 나에게로 다가왔다. 여의사는 하이탑 장군을 진찰 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나를 진찰했다. 내 발을 그녀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니, 얄팍하지만 쑥 들어간 살은 탄력을 잃고 잘 올라오지 않았다. 나는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으니좀 봐달라고 하면서 귀를 여의사 쪽으로 돌렸으나, 그녀는 이비인후과 전문의가 아닌 듯 건성으로 보는둥 마는둥 하였다.

    나는 혈관 속에 개미가 살살 기어다니는 것 같은 증상이 자주 일어나고,이마의 피부를 머리카락 있는 쪽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것 같은 이상한 증상도 있고, 편도선이 자주 아프고 부으며, 앉았다가 일어설 때는 눈에 현기증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그럴 때마다 앞이 캄캄해지며, 짙은 흑녹색 어둠 속에 별들이 수도없이 명멸하며 지나간다는 증상을 말했다. 그러나 여의사는 조용히 들을 뿐 별로 신통한 대답이 없었다.

    여의사는 영어로 폐는 건강하고 혈압도 정상이며, 단지 각기병에 걸렸다고 하고는 약을 보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기타 질환에 대해서는 건강하다는 말도, 나쁘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다 못알아 듣는 것인지, 또는 그런 병은 전문 분야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다는 것인지, 혹은 그런 병을 고쳐주는 약은 형무소 병원에 없다는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타 질환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나의 인사에 선녀는 머리를 약간 숙여 답례한 뒤 일행과 함께 감방을 나가 버렸다. 육중한 격리 감방 철문은 무거운 쇳소리를 내면서 덜커덩 잠겼고, 밖에서 굵은 쇠빗장을 가로잠그는 마찰음이 쩡그렁 덜컥 나고 자물쇠 채우는 소리가 쩔꺼덕 났다. 그 후 한 시간쯤 있다가, 남자 간호원 한 명과 경비원 두 명이 약봉지에 담은 약을 가지고 왔다. 하이탑 장군에게는 직경 8~9mm의 둥글고 엷은 황토색 정제 6알과, 그보다는 좀 큰 백색정제 9알을 주었다. 황토색 정제는 비타민 B₁이고, 백색 정제는 폐병 치료약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하이탑 장군에게 준 것과 똑같은 비타민 B₁6알을 주었다. 비타민B₁은 아침과 저녁 식사 후에 1정씩 먹으라고 했다. 하이탑 장군의 폐병 치료약은 하루에 3정을 여덟시간 간격으로 복용하라고 했다.

    사흘이 지나자 치화형무소 병원 측은 또 3일 분의 약을 하이탑 장군과 나에게 보내왔다. 결국 6일간의 약을 먹게한 후 약이 끊기고, 다시는 약을 얻을 수 없었다. 어쨌든 A동 수감자에게 치료 약을 주었다는 것 자체, 그리고 여의사가 왕진을 왔다 갔다는 사실은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특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구 중위가 애써준 덕분이었다. 1976년 8월 11일, 두 번째의 일광욕을 할 수 있었다. 비타민 12정의 복용, 두 번의 일광욕, 이러한 혜택을 받기는 했으나 치화형무소의 식사는 아침식사와 저녁식사 두끼 뿐이며, 점심은 굶어야 했다. 또한 아침식사와 저녁식사 마저도 밥의 양은 내가 평소에 먹는 양의 3분의 1도 채 못되었다. 부식이라고는 싱겁고 늙은 멀건 호박 소금국 같은 것을 반컵 정도 주니, 그것을 먹고 건강을 유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이대용 전 주월공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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