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밤 들려오는 '애수의 여음(余音)', 치화형무소의 잇단 '자살' =  비, 비, 비비, 비- 야자수와 망고나무가 있는 곳에서 고요한 밤 공기를 가르며 새 울음소리가 치화형무소 감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무슨 새일까? 새의 울음소리는 가냘픈 애수를 띠고 있었다. 그 애수의 여음(余音)은 심란해서 잠 못 이루는 중형 정치범 수감자들의 슬픔과 아픔과 고독의 상처에 비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바깥세상과 철저하게 차단된 형무소 중형수(重刑囚)의 하루는 옥외의 열흘 보다도 더 느리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어느 날, 치화형무소 B동 2층에서 20대 초반의 여자 수감자가 시에스터 시간에 목 매달아 자살했다. 또 얼마 후인 7월 17일에는 A동 4층 남자 수감자가 역시 시에스터 시간에 벽에 박힌 큰 못에 머리를 쾅쾅 찍어 자살을 감행하자 수감자들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착잡해졌다.

    프랑스 총영사에게 보내는 편지 = 7월 22일 아침, 터널같은 복도를 왕복하며 물을 길은 다음, 나는 경비원이라고 불리는 활동 죄수 옹바오에게 담당간수 구 중위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 구 중위가 통역원을 데리고 왔다. 나는 그에게 다음 내용을 요청했다.

  • ▲ 이대용 전 주월공사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 당시
    ▲ 이대용 전 주월공사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 당시

    “나는 294일 동안의 옥고에서 많은 병이 생겼으니 의약품의 차입을 받아야겠고, 식품과 일용품의 차입도 받아야겠다. 나는 국제 외교관의 일원이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외교단의 관심은 지대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사이공에 프랑스대사관이 있었는데 지금은 총영사관만 남아 있을 것이다. 프랑스 공관은 1975년 8월에 내가 한국으로 귀국 할 수 있게 항공표도 제공해 주었으며, 지금도 나의 후견기관이다. 나는 이 후견기관에 차입 요청편지를 내겠다. 치화형무소 당국은 이 정당한 권리를 인정하고 내 요구를 들어주기 바란다.”

    구 중위는 편지를 쓰라고 했다. 나는 경비원에게 백지 몇 장을 얻어 영어로 간단히 편지를 썼다.

    1976년 7월 22일, 존경하는 프랑스 총영사님. 그간 총영사님이 하사이공주재 프랑스 총영사관 직원 모두 안녕하십니까? 저는 건강이 매우 악화되어 의약품, 식품, 일용품 등 차입이 필요합니다. 차입품 리스트를 이 편지 밑에 적으니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차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이공 주재 프랑스대사관에 근무하던 모로 일등서기관이 아직도 사이공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프랑스 정부와 사이공 주재 프랑스 공관원들이 한국 외교관들에게 베푸는 따뜻한 지원에 늘 감사합니다.경구(敬具) 한국공사 이대용

    치화형무소 A동 4층 2호실에서 이렇게 편지를 쓰고 그 밑에 종합비타민·귓병약·편도선염약·감기약·세면도구·볼펜·노트·땅콩·치즈·버터·생선포·육포·설탕·간장 등의 차입 품목을 적었다. 편지는 오후에 구 중위에게 주었다. 구 중위는 이 편지를 호치민에 있는 프랑스 총영사에게 주면 되느냐고 물은 후 가지고 갔다. 어차피 검열 할 것이므로 봉투는 없어서 못 주고 편지 알맹이만 주었다. 형무소장이 허락하고 보내 줄 생각만 있다면,  봉투 한장 얻는 것 쯤은 문제가 아닐 것이다.

    쓰레기로 짓밟힌 치화형무소 수감자들의 인권  = 구 중위는 매우 친절하고 어질다고 소문이 난 간수였다. 다른 간수 같으면 내가 만나자고 요청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만나러 와줄리 만무했다. 당시 치화형무소의 분위기는 간수는 구름 위의 귀인(貴人)들이고, A동의 수감자들은 땅 위에서 짓밟히는 쓰레기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소위 삥찐(=9등병)이라고 비하되어 불리기도 했다.

    “그대들은 이미 사형을 당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오늘까지 그대들을 살려주고 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들은 죽을죄를 진 과거를 반성하고 가이따우(=인간개조)를 해야 한다.” 간수들이 A동 수감자들에게 귀가 아프도록 반복하는 훈시였다. 못된 간수들은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언동을 하는 수감자들을 철창에 손목과 발목을 묶어 거꾸로 매달기도 했다. 큰 대(大)자를 거꾸로 한 형태로 매달린 수감자는 잘못했으니 제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매달린지 10여분이 지나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엉엉 울었다. 30분쯤 되면, 거꾸로 매달린 수감자는 기절해 조용히 축 늘어진다.

    그런 후에도 간수들은 좀 뜸을 들였다가 풀어준다. 이때 간호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활동 죄수들이 와서 기절한 수감자를 풀어주고 주무른다. 그러면 축늘어졌던 수감자가 의식을 회복하며 소생한다. 이러다가 수감자가 혹시 죽는다해도 별 문제는 없다. 형무소 정문에서 수백미터 떨어져 있는 형무소 묘지에 묻어 버려도 되고, 또 유가족에게 민족반역·반동분자의 시체를 돌려 주어도 된다. 이럴 경우, 반동분자 유가족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묵묵히 시체를 받아가지고 가면,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된다.

    어느 날 D동에 수감돼 있던 구 남월군 대령이 자살했다. 치화형무소 측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대령의 부인을 불러서 시체를 인도했다. 남편의 시체를 본 부인은 슬피 울었다. 시체를 인도장소로 운반하고 간 중국계 활동죄수 찐꽝럭(陳光力)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간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 부인을 나무랐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시끄럽게 울어대는 거야! 울겠으면 집에 가서 울든지 말든지 해! 썩 조용하지 못 하겠어! 이 못된 것.” 겁에 질려 눈물을 거둔 부인은 남편의 시체를 받아 돌아갔다. 수감된 한국 외교관 3명과 민간인 11명 중에서 심하게 매를 맞은 사람은 민간인 이상관(李相官)이었다. 그는 어느 날 감방 안에서 간수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았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간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자전거 쇠사슬로 계속 후려쳤다. 옆 감방에서 엿듣고 있던 안희완(安熙完) 영사는 마음이 몹시 괴로웠다고 한다.

    298일 만에 햇빛을 보게 해 준 친절한 간수, 구 중위  = 이렇게 살벌한 치화형무소 안에서도 구 중위만은 수감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실로 군계일학처럼 고고하고 귀한 존재였다. 나는 프랑스 총영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구 중위에게 줄 때, 일광욕도 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수감된 날로부터 이날까지 일광욕을 한번도 시켜주지 않아 햇볕을 단 1초도 받지 못했으니, 상부에 보고해서 나에대한 일광욕 금지를 풀어달라고 했다.

    1976년 7월 27일 아침 7시경, 구 중위가 경비원이라고 불리는 활동죄수 옹바오를 대동하고 와서, 나와 구 남월군 육군소장이며 와화우군(和好敎軍) 총사령관이었던 하이탑 장군이 함께 수감되어 있는 A동 4층 2호 감방 문을 열고 일광욕을 시켜 줄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나와 하이탑 장군은 구 중위를 따라 바깥과 차단된 복도를 거쳐 어두컴컴한 계단을 발을 헛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내려갔다. 도중에 몇 군데 잠겨있는 철창문을 통과하여 뒷마당에 나왔다. 남국의 아침 해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간밤에 내린 소나기의 빗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망고나무의 싱싱한 잎들이 미풍에 가볍게 움직였으며, 끝없이 넓은 하늘은 드높고 푸르게 개어 있었다.

    실로 298일 만에 햇빛을 보는 것이다. 단 5초만이라도 햇볕을 몸에 받아 보았으면 하던 애절한 소원은 이제 이루어졌다. 동쪽에 높이 솟아 오른 태양의 크기와 모양은 10개월 전이나 어제나 변한 것이 없건만, 햇빛이 인간에게 베푸는 은혜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이에 감사하고 태양의 위대성에 새삼 감탄했다. 나는 러닝 반소매 T셔츠와 양복바지를 벗고 팬티 한 장만을 입은 채, 다시 팬티마저 최대로 걷어 올리고 햇빛을 담뿍 받았다.

    비타민 PP 결핍으로 피하세포가 파괴되어 허벅지와 팔에 수도 없이 많이 생긴 흰 구더기 모양의 반점들과, 살이 너무 빠져 흉하게 툭툭 튀어나온 장딴지와 팔의 정맥들에도 햇볕을 골고루 쪼이기 위해, 다리를 벌리기도 하고 팔을 올리기도 했다. 굶주림과 정신적 옥고에 시달려 내 체중은 78킬로그램에서 46킬로그램으로 뚝 떨어져 있었다.

    구 중위는 밝은 햇빛에 노출된 병들고 시든 내 몸을 가까이에서 유심히 살펴보고, 측은한 시선을 던졌다. 구 중위는 생김새가 한국사람 같았다. 피부는 황색이긴 하지만 흰 편이고, 키는 월남인의 평균보다는 3~4센티미터가 커보였다. 얼굴은 네모 비슷한 둥근형이고 눈은 시원했으며,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 ▲ 이대용 전 주월공사 베트남 치화형무소에 수감 당시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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