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 간의 공백. 도중 저예산 예술영화 ‘히말리야, 바람이 머무는 곳’에 출연했지만, ‘주먹이 운다’ 이후 오랜만에 상업 영화 출연인 만큼 인터뷰를 꺼려한다는 관계자의 귀뜸에 다소 긴장된 마음으로 약속 장소에 들어섰다. 영화 속 강렬한 이미지 역시 한 몫 했을 터.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지난 16일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한 호텔 라운지에서 그를 만났다. “속 시원하게 한번 이야기 해 봅시다.” 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선 그를 보는 순간 그간의 걱정은 말끔히 사라진다. 유독 이번 작품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 해왔었기 때문일까, 어느새 영화 속 연쇄살인마 장경철을 훌훌 털어낸 듯한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역할에 한번 빠지면 심하게 빠져…5개월 간 '더미'와의 싸움 고통
    - 유영철 만나볼까 생각…영화 속 '끔직함' 현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 연기는 철저한 이기주의에서 시작, 이제 막 일에 대한 열망 터졌다

    자리에 앉자 마자 담배를 찾던 그는 ‘금연’이라는 말에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금연과 상관 없이 살아온 인생. 딱 1주일 간 금연을 결심한 적이 있었지만, 곧장 포기했다. 맛동산 한 봉지 때문에 친구와 치고 박고 싸운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친구가 다 큰 성인이 무슨 과자냐며 과자봉지를 뺏어 던져버렸어요. 그래서 ‘너한테는 하찮아도 나는 죽을 것 같아!’라며 소리쳤죠. 점점 분위기가 험악해지면서 결국 서로 주먹질까지 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이러다 미치겠구나 싶었죠.”

    영화처럼 실제로도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걸까. “오래 살고 싶고, 작품도 많이 하고 싶습니다”라고 허허 웃어 보이는 그는 “한번 빠지면 심하게 빠지는 스타일”이라고 설명했다.

    그간의 연기 생활 중 ‘이러다 일 나겠다’ 싶은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넘버 3'를 시작으로 '쉬리', '파이란', '해피엔드'.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로 지울 수 없는 기억을 남기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떠올려 보니 엄살은 아닌듯 하다.

    “영화 ‘파이란’을 촬영 할 때는 운전을 하던 중 버스기사와 싸움이 붙은 적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죠. 이번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데, 사우나를 마치고 엘레베이터를 탔는데 어떤 분이 ‘어디 최씨야?’라고 물어오더라고요. 평소에는 ‘전주 최씨예요’라고 말했을 텐데, 순간 ‘왜 반말을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지버튼을 누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천장에 설치된 CCTV를 보고 겨우 정신을 차렸죠.”

    지금까지의 영화 중 이번 ‘악마를 보았다’가 가장 힘들었다고 이야기 하는 그. 물리적인 액션신은 견뎌낼 수 있었지만, 매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슴이 묵직해져 지치기 일쑤였다. 5개월 동안 ‘더미’와 씨름하며 겪은 정신적 고통은 이로 말할 수 없었다. “촬영이 끝나고 분장을 지우고 집에 돌아가면 샤워도 못하고 그냥 뻗어버렸어요. 내내 정신적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일어났을 때 개운함을 느낀 적도 없었죠. 마치, 꼬박 밤을 새운 듯한 느낌으로 매번 촬영장을 향했어요.”

    실제,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을 보며 꺼버리는 남자. 슬래져 무비는 지독히도 보기 힘들단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여성들을 때리고, 찌르고, 토막내기 까지 했던 그의 의연한 눈빛을 떠올리니 의외다. “영화를 보면서 저도 많이 참았어요.”라며 웃어 보이는 그는 “오맨이나 액소시스트처럼 신의 영역과 종교적 악마와의 대립을 담은 영화는 흥미로운데 톱으로 몸을 절단하고 하는 건 못 보겠더라구요”라고 엄살을 피운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공개되자 관객들의 호불호가 뚜렷히 갈렸다. 평점은 6점대. 다만, 어중간하다는 평가는 아니다. 1점과 10점이 극명하게 나뉘며 만들어낸 결과. 영화가 사회적 담론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을 밝혀온 그에게는 만족스러운 결과일 듯 했다. “관객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대로예요. 찍으면서 스스로도 ‘이거 괜찮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해요.”

    최민식은 “관객들이 느끼는 그대로를 느껴주길 바란다”라며 어떠한 설명이나 변명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김지운 감독이 왜 이토록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만 하다고 덧붙였다.

    영화의 잔인함과 폭력성에 대한 부정적인 파급력을 우려하는 소리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 했다. 그는 “그러한 우려가 오히려 건강한 자정능력이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라며 “영화 ‘친구’ 이후 모방범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는 ‘과연 그것이 진짜 이유인가?’에 대한 의문은 품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에서 총 두 번의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으며 약 1분 30초 분량의 컷을 삭제해야만 했다. 지난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김지운 감독은 자신의 필름을 가위질 해야 했던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영등위 심사에서 삭제된 부분은 저도 많이 서운해요. 펜션 부분이 상당히 망가졌죠. 온전히 묘사가 됐더라면, 영화가 내포하는 또 다른 표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을 텐데요.” 영화 속 ‘악마의 소굴’이자, 경철의 베이스 캠프로 등장하는 펜션 신에 대한 아쉬움을 많다. 인육을 개에 던져주는 장면과 인육을 먹는 장면 등이 잘려 나갔다. “그래도, 그게 김지운 감독의 최상의 편집이었어요.”라고 덧붙이는 그. 감독과 스탭, 배우 모두 함께 했던 그간의 마음고생이 얼굴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 이어 또 다시 광기 어린 살인마로 분한 최민식. 5년 만에 복귀이기에 큰 이슈를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니었냐는 일각의 시선에 대해 그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작전이 있었다면, 더 멋있고 삼삼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

    “사실 지난 5년 동안 ‘악마를 보았다’ 보다 더 하고 싶은 작품도 있었어요.”라고 말하는 그는 6개월 간 기다렸던 작품이 제작사를 통해 무산되는 등 인연이 닿지 않아 하지 못했던 에피소드를 털어놓기도 했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아열대의 밤’이라는 시나리오를 받았다. 바로, 그 작품이 ‘악마를 보았다’였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그의 눈길을 가장 먼저 끈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처음부터 밝혀진 상태에서 시작되는 영화라는 점. 그리고, 계속 범인을 잡았다가 놓아주는 수현의 감정 역시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사람들이 벌레를 죽이기 위해 눌렀다가 다시 풀어주고, 또다시 누르며 장난을 치는 듯한 모습이 떠올랐다. 고통의 끝을 보여주겠다는 감정선이 강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최민식은 “영화 속에 여백이 느껴졌어요. 연출의 시각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폭력에 중독된 사람들의 분노가 원색적으로 다가왔어요”라고 출연을 결심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명불허전, 그가 연기한 경철은 천하의 악당이며 고통이나 굴복이 뭔지 모르는 불굴의 생명력과 승부욕을 가진,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예측불허의 캐릭터로 입체성을 얻었다. 최민식만이 표현할 수 있는 광기어린 연쇄살인마 경철은 한국 영화에서 본 적 없는 새로운 악역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배우가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어렵게 연쇄살인범 유영철을 담당했던 형사를 만나 연기에 대한 조언을 얻었다. 유영철을 한번 만나볼까도 생각했지만, 참았다. 그를 만나게 되면, 그의 모습을 롤 모델로 삼고 연기할 것만 같았기에 그건 아니라고 생각됐다. 그는 “살인마의 이미지에는 정답이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형사를 만나며 여러 이야기를 듣고, 이 세상에는 실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사건들이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깨달았다. 영화 속에서 다루는 끔찍한 장면들은 현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수현’ 역할로 한석규를 떠올리기도 했다는 그는 “영화 ‘쉬리’ 이후에 오랜만에 꽃중년들이 모여서 새로운 작품을 하나 해보나 생각했죠.”라고 웃어보였다. 그러던 중 수현 역에는 이병헌이 캐스팅 됐다. 아쉬움은 없었을까.

    “감독이 원하는 캐스팅을 절대적으로 존중해요. 감독이 가장 필요로 하는 배우가 있고, 그 이유는 영화를 촬영하며 알게 됐죠.” 그는 영화작업은 ‘룰’에 의한 작업이라 말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최상의 사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분야를 존중해줘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최민식은 “그래서 더 힘들고, 매력적인 것이 바로 이 일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작품에서 배우로서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 그만큼, 수십년의 배우인생 동안 그가 겪고, 느낀 것들이 많은 탓일거다.

  •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 배우 최민식 ⓒ 김상엽 기자

    수많은 후배들로부터 롤 모델로 꼽히기도 하는 그는 쑥스러운 듯 “제가 술을 좀 많이 사서 그래요”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통해 그를 향한 갈증을 꼬박 5년간 참아야 했던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며 다시금 자신의 존재감을 확고히 다진 배우 최민식은 “과연 기다려 주신 분들이 계셨을 까요.”라며 웃는다. 요즘 젊은 이들 중에 자신을 모른다는 사람도 많다고 덧붙이는 그다.

    “5년간의 아쉬움이 있던 만큼,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요. 너무 목말라 있었거든요. 내가 만들어서 맛을 본 후 너무 맛있어서 손님에게 내놓는 요리처럼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제 연기는 철저한 이기주의에서 시작되는 것 같아요. 이제 막 일에 대한 열망이 터졌어요. 공격적으로 해볼 요량입니다.”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차기작은 경쾌하게 블랙코미디가 될 것 같다고 귀뜸하기도 했다.

    요즘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속이 다 녹아내렸다는 그는 “사람들과 만날 거리가 생긴 거죠”라며 기분 좋은 듯한 목소리를 낸다. 동료 배우들은 그를 보면 ‘연기 잘했다’가 아닌 ‘정말 고생했겠다’라고 말한다. “얼마 전에 류승완 감독에게 영화를 봤다고 전화 왔는데 부인이랑 ‘빨리 다른 역 해야지’라고 걱정을 하더라고요”하며 웃어보이는 그.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경철을 빨리 잊고 싶다는 그에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하니 “분명 잊혀질 거예요. DVD로 나오면 내가 다 사버려?”라며 익살스러운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