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외교관 세 명에 대한 치회형무소의 파격적인 특혜
    20여평의 넓은 감방 제공과 일체의 육체적 노동 면제

    1975년 10월 10일에 있었던 광대뼈의 제1차 신문에서도, 이번에 있었던 짝 중위의 교묘한 대필서기를 통한 간접 신문에서도, 나는 소신을 관철시키며 결단코 항복하지 않았다.

    짝 중위의 지시에 따라 대필서기 찐이 내 진술서라는 것을 작성한지 일주일이 좀 지난 7월 12일, 한국외교관 세 명은 BC동 3층 5호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20여 평이 되는 넓은 감방에 한국외교관 세 명 만을 수감하니 이러한 대우는 치화형무소에서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날 오후 3시경, 느닷없이 광대뼈가 그의 보좌관 한명과 BC동구대장을 대동하고 우리 감방에 나타났다. 그는 우리의 건강상태를 물어보고, 감방이 호텔같이 넓어 좋겠다고 했다. 또 차입을 충분히 받고 있는가 등을 물어보며 약 15분간 머물다가 돌아갔다. 그들 일행이 감방 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 간수가 나타나더니, 우리 세명에게 다음과 같은 특혜를 준다고 말했다.

    1. 매일 아침 물을 길은 다음, 노천 물탱크에 내려가 특별 목욕을 할 것.
    2. 감방에서 사용하는 변소 용수, 세면 및 설거지 용수 등을 길어 오는 일 이외에는 일체의 육체적 노동을 면제함.
    3. 매일 아침 점호시 부터 오후 5시까지의 기간 중 시에스터 시간을 제외하고는 감방 철문을 계속 개방하니, 복도에 나가서 체조·구보·산보·일광욕 등을 마음대로 할 것.
    4. 식수는 특별히 뜨겁게 끓여서 펄펄 끓는 물을 오전 오후 각각 반양동이 공급해 주겠음.

    참으로 치화형무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요구하는 사항을 잘 써주면 석방시켜 주겠다"
    "못 쓰겠다. 쓸 의무가 없다. 죽일테면 죽여라"

    이로부터 불과 3일 후인 1978년 7월 15일 아침 여덟 시경. 광대뼈는 안닝노이찡 영어통역 장교 두명을 대동하고 우리 앞에 나타나서 감방 옆에 있는 BC동 의무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백지(타자용지) 10여장과 볼펜을 주면서, 오늘 자기가 요구하는 사항을 잘 써주면 나를 석방시키겠다고 말했다.

    내가 써야 할 항목은 작성연월일, 성명, 생년월일, 직업, 국적, 본적, 한국주소, 월남주소, 종교, 가족사항, 학력, 경력, 베트남 정부의 인도주의 정책에 대한 증언, 베트남 정부에 대한 요망사항 등으로 되어있었다. 나는 항상 하는 말을 되풀이 했다.

    “나는 유엔이 인정하는 국제외교관이오. 당신의 요구를 받아들일 의무가 없소. 그러나 내가 죽었을 때 등을 고려해서 행정 사항을 적어주겠소.”

    광대뼈 일행은 내가 쓰는 것을 하나하나 지켜보았다. 가짜 학력쓰기가 끝나고, 1948년 4월 1일 서울대 사대부속 중고등학교 경제와 역사담당 교사가 되었다고 역시 가짜 경력을 썼다. 그런다음 25년간의 공백기간을 껑충 뛰어넘어, 1973년 4월 6일에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공사 겸 부공관장으로 부임했다고 썼다. 그러자 광대뼈가 멈추라고 하더니 “경력을 왜 이렇게 25년간이나 빼먹는가? 매년 무엇을 했다고 상세히 쓰라”고 했다.

    나는 “못 쓰겠다. 쓸 의무가 없다. 당신들이 그런다면 나는 아무것도 안쓰겠다. 행정사항도 집어치우겠다. 죽일테면 죽여라”고 답했다. 나의 국가관·사생관·지조를 상당부분 알고있는 광대뼈 일행은 불만과 함께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더이상 강요해봐야 소용없다고 체념한듯 묵묵히 있었다.

    내가 펜을 다시 집어들고 쓰려고 하자, 광대뼈가 통사정하듯 작은 목소리로 “매년 무엇을 했다고 경력을 상세히 쓰시오”라고 연거푸 말했다. 나는 아예 들은체 만체 무시해 버리고, 베트남 정부의 인도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포악무도하고 비인도적이며 불법적이라는 욕 밖에 쓸것이 없는데, 어떻게 할것인가를 망설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수감기간 중 나는 혹독한 정신적 고문과 굶주림 고문은 악질적으로 받았으나, 구타라든가 전기고문 같은것은 받은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쓰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써내려 갔다.

    “본인은 치화형무소에 수감된 1975년 10월 3일부터 1978년 7월 15일까지의 기간중 고문 당하거나 구타 당한 일이 없음.”

    그리고 인생 밑바닥에서 고된 시련을 겪으며 궂은 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몇명의 간수가 간혹 베풀어준 혜택에 대해서 기록하기로 했다.

    1. 1976년 12월 20일부터 익년 1월 8일까지 : 치화형무소 A동 3층 담당 간수는 본직에게 매일 아침 약 30분간 복도에 나가 체조와 구보를 하게 해주고, 그후 목욕을 할수있는 특혜를 주었음. 기간 중 3회의 일광욕을 시켜주었음.

    이런식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5개항을 썼다. 이러한 혜택은 베트남 정권의 인도주의적 기본 정책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간수 개인이 나를 도와준 고마운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간수들 중에는 마음 착한 사람이 더러 있었다.

    마지막 항인 베트남 정부에 대한 요망사항에는 “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정부가 1961년에 유엔이 스폰서가 되어 제정한 비엔나협정과 국제 관례를 준수하여, 나와 두 명의 한국외교관을 석방할 것을 정중히 요구한다.” 이것이 끝나자 이름을 쓰고 서명하였다.

    광대뼈는 내가 쓴 것을 받아 가방에 넣은 후 일어서서 악수를 청했다. 나는 난생 처음 그의 손을 잡아보았다. 그리고 내가 싫다고 해도 피우라면서 월남 담배 반꼬 한 갑을 책상 위에 놓고 도망치듯이 나가버렸다. 안닝노이찡이 지난 몇 개월 동안 하는 행동으로 봐서 나를 석방시킬 것 같은 징후가 농후하게 나타나기는 했다.

    하지만 공산 독재 정권들은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꿔 정반대의 짓을 식은 죽 먹듯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돌발적 흉사가 신상에 다가올지 몰라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근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주소 : 서울 종로구 동숭동 1-49 동숭빌딩 301호
    전화 : 02-763-8996 (편집부)
    홈페이지 : http://www.guiparang.com/
    E-mail : info@guipar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