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5년 4월 28일 주월 한국대사관 폐쇄

    주월 미국 대사관측이 정해주는 대로 한국인들이 질서있게 행동한다면 철수작전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75년 4월 28일, 사이공 웬주가 109번지에 있는 주월 한국대사관은 폐쇄되었다. 대사관 직원 전원은 저녁에 환딘풍가 53번지의 한국 대사관저에 집결하여 미국대사관 측으로부터 헬리콥터 탑승시간과 장소에 관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대기 상태에 있었다.

     

  • ▲ 1968년 2월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한창이던 베트남에서 포로가된 베트콩의 한 간부가 끌려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 1968년 2월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한창이던 베트남에서 포로가된 베트콩의 한 간부가 끌려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밤이 되니 북월 공산군의 130밀리 장거리 평사 포탄이 요란스럽게 탄산눌 공항을 강타하였다. 날이 새고 4월 29일 아침이 왔다. 이때 한국 대사관저에 집결하여 대기하던 인원은 한국 외교관 13명, LST 연락장교 1명, 사병 2명, 대사관 고용원 5명, 한국대사관 철수 취재기자인 한국일보 안병찬(安炳贊) 기자, 그리고 김상우(金相羽) 목사가 끼여 있었다. 그러나 29일 아침에 한국 해군 예비역 하사관과 그의 가족 4명이 들어오면서 민간인 수는 5명으로 늘어나 총 인원은 27명이 됐다. 교회 지도자 김상우 목사는 청와대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과 용산고등학교 동기동창이며, 가까운 친구사이로 알려져 있었다.

    4월 29일 아침, 한국 대사관 직원들은 지난번 한국 LST로부터 얻은 라면을 끓여먹었다. 아침식사가 막 끝날 무렵 월남에서 40여년을 살아온 고희가 넘은 안수명(安壽命) 노인이 찾아왔다. 그는 우리 대사관 휴지 소각장에 타다 남은 서류뭉치들이 이리저리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고 했다.

    우리 비밀문서가 공산측 수중에 들어가는 것이 걱정되어 나는 무관보좌관 이달화(李達華) 공군 소령을 데리고 대사관으로 향했다. LST 연락장교 이문학(李文學) 해군 중령이 자청해서 함께 갔다. 우리 대사관에 도착해보니 안노인의 말대로 많은 서류뭉치가 겉만 불에 그을리고 속은 깨끗한 채비에 젖어 뒹굴고 있었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실수가 생긴 것은 서류를 태우던 4월 28일 오후에 한국 대사관에서 벌어진 큰 소동 때문이었다.

    - 날벼락 같은 수백발의 포성이 대사관 건물을 흔들다

    1개월 전에 북월 공산군은 다낭 비행장에서 남월 공군의 A-37 전투기를 여러 대 노획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북월 공군 조종사들을 선발하여 노획한 A-37 전투기에 대한 조종훈련 및 사격훈련을 3주간 실시케 했다. 그리고 4월 28일 1개 중대로 편성된 A-37 전투기들이 사이공 탄산눌 공항상공에 나타났다. 이 중대의 지휘관은 4월 8일 독립궁을 폭격하고 북월군 쪽으로 달아난 왠탄쭝 전 남월공군 중위였다.

    A-37 전투기들이 탄산눌 공항에 접근해 오자 공항의 민간 항공관 제탑에서 소속을 물었다. 웬탄쭝전 남월 공군 중위는 영어로 미국 공군기라고 대답하고 기습적으로 공항을 공격했다. 이때 남월 대통령의 집무실과 숙소가 있는 독립궁에 배치되어 있던 고사포, 에끼에끼 구경 0.5인치 대공기관총, 구경 0.3인치 기관총, 전차에 장치된 0.5인치 대공기관총 등등이 적기의 독립궁 접근을 저지하기 위해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이 대공사격은 약 20분간 계속 되었다.

    한국 대사관은 독립궁으로 부터 100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날벼락 치듯 수백발의 포성이 숨 돌릴 새도 없이 대사관 건물을 흔들어 대고, 수만발의 대공기관총 소리가 고막을 찌르듯 들려오니 전투 경험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두 혼비백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사관 직원 중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산군이 우리 대사관으로 쳐들어 오는 줄 알고 제각기 돌출된 독특한 반응을 보이면서 순식간에 흩어져 몸을 숨겼다. 그러나 노련한 전투 경험자는 총성 첫발부터가 우리 대사관을 향해 쏘는 총성이 아님을 금세 알아차렸다. 우리쪽을 향해 쏘는 총성과 그렇지 않은 총성은 뚜렷하게 다르게 들리는 것이다.

    나는 방문을 열고 복도를 따라 독립궁이 잘 보이는 모퉁이로 걸어갔다. 타자수 고송학(高松鶴) 양이 사색이 되어 다급히 소리쳤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독립궁 쪽으로 가면 총에 맞아 죽는 줄로만 알고 제지시키려는 고양의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었다. 적기는 탄산눌 공항 쪽에 있는 듯 대공화력이 그쪽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5분 가량 독립궁 쪽 상황을 바라보던 나는 대사관 직원들을 안심시키려고 총포성을 뒤로 한채 별관 2층과 본관 2층을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고송학 양이 있을 뿐, 다들 어디로 숨었는지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다. 약 20분간 요란스럽던 포성은 멎고 상황이 끝났으나 아무리 찾아봐도 한동안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너무 후미진 곳에 꼭꼭 숨어서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베트콩들이 대사관 문으로 왈칵 쳐들어 오는 줄만 알았어요.”

    머쓱해진 누군가의 독백이었다. 그날은 비가 간간히 내려 서류뭉치가 잘 타지 않았는데, 그런 소동까지 벌어져서 결국 이번 소각장 사고가 발생했구나 하는 추측을 하면서 나는 비밀문서를 포함한 모든 서류를 태워버렸다.

    대사관저로 돌아가는 길에 홍땁뜨가에 있는 남월 전 부수상이며, 남월 국민당 지도자인 짠반뛰엔(陳文典) 저택에 들렀다. 그의 큰딸은 한국 외교관인 이백기(李伯基) 서기관과 결혼하여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된 인텔리 여성이었다. 짠반뛰엔은 북월의 팜반동 수상과 보웬잡 국방상, 그리고 남월 수상인 부반마우와 하노이 대학의 동기동창이며, 이 네명은 대학시절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짠반뛰엔은 앞으로 한국이 북한과 남북 대화를 하는데 귀중한 교훈이 될 수 있도록 남·북월 사이에 오고간 비밀협상의 내용과 현재 진행 중인 긴박한 어려움을 이야기 해주었다.

    그의 이야기를 약 15분간 주의 깊게 듣고 있는데, 밖에서 기다리던 이달화 소령이 시간을 끄는 것이 지루하다는 듯 자동차 클랙슨을 몇 번 눌렀다. 그러더니 내가 있는 응접실로 들어와서 돌아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한국 대사관저에 전화를 걸어 미국대사관으로부터 탑승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연락이 왔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 전화기는 옆에 있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이 소령이 한국 대사관저에 있는 자신의 직속상관 무관 정영순(鄭永淳) 육군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 대령은 미국 대사관 철수본부 연락관으로 부터 “한국대사관 직원은 제 3 아셈브리 포인트로 가서 헬리콥터를 타고 미 제 7함대로 철수하라”는 전화연락이 와서 지금 막 출발하려고 하니 속히 돌아오라고 했다.

     

  • ▲ 1968년 2월 베트콩의 구정공세가 한창이던 베트남에서 포로가된 베트콩의 한 간부가 끌려나오고 있다 ⓒ 연합뉴스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도서 출판 기파랑]

    주소 : 서울 종로구 동숭동 1-49 동숭빌딩 301호
    전화 : 02-763-8996 (편집부)
    홈페이지 : http://www.guiparang.com/
    E-mail : info@guipar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