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장 황제의 밀사 ⑫ 

     에와(EWA) 농장에 모인 한인은 2백여명이나 되었다.
    한인 농장이어서 불을 밝힌 마당에는 한인 남녀들로 가득 찼는데 그중 반 이상이 대여섯시간 거리의 농장에서 왔고 몇 명은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근처 섬에서 산다.

    와드먼과 윤병구가 내 소개를 마쳤을 때 군중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내가 배재학당에 입학 할 당시만 해도 조선인은 박수라는 것을 몰랐다. 그런데 이제 미국 땅에 건너온 조선인 즉 한인은 박수에 익숙하다.

    연단에 선 나는 심호흡을 했다. 2백여 쌍의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사방은 조용했다. 모기를 쫓으려고 피운 나뭇잎 타는 냄새가 구수하게 맡아졌다.

    내가 입을 열었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 상태가 되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은 자식을 팔고 부모를 버리는 처지에 이르렀으며 일본군은 부역으로 다리에 힘이 남은 남자는 다 잡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장내는 숙연해졌다. 나는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원을 모아놓고 개혁을 외치던 웅변가였다.
    5년 7개월간 감옥서에 갇혀 있으면서 웅변할 기회는 잃었지만 대신 머릿속에 논리는 가득 채웠다.

    나는 말을 이었다.
    「조선 백성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가 있다면 지도자를 잘못 만난 죄일 것입니다. 나라가 외세의 침탈에 위협 받는 동안에도 제 이익만을 만들었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차마 황제를 대놓고 비판할 수가 없었는데 만리 타향인 이국땅에서 조국에는 의지해야 할 누군가가 존재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은 황제가 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황제의 욕심, 조선이 곧 제 소유물이라는 의식, 백성이나 국가보다 왕실부터 챙겼던 이기심이 이 결과를 초래했다고 믿었다. 황제가 다 버리고 개화의 흐름에 맡겼다면 이렇게까지는 안되었다.

    끝까지 권력을 쥐려다가 사지가 다 잘려나간 이런 병신이 되어 일본이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 먹는다. 그것도 왕실만이 말이다.

    나는 어떻게 연설을 이어갔는지 모르겠다. 주먹을 허공에 흔들고 목청을 높였으며 때로는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짖었을 때 청중들은 나와 일체가 되어갔다. 같이 소리치고 또는 함께 울었으며 일어나 환호하기도 했다.

    내 연설은 새벽까지 4시간이나 계속되었는데 끝났을 때는 모두 지쳐 늘어졌다.

    「형님, 이런 감동은 처음 받습니다.」
    내 옆으로 다가온 윤병구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이곳에 온 한인들은 모두 형님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쌓인 한이 많아서 말이 너무 길어졌네.」

    쓴웃음을 지은 내가 말을 이었다.
    「감옥을 나와서 첫 연설이기도 하네.」
    「그러시군요.」

    윤병구와 나는 건물 뒤쪽의 작업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주인이 마련해 준 내 휴식장소였다. 안으로 들어선 나는 의자에서 일어서는 여자를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오선희였던 것이다. 6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나는 바로 알아보았다.
    머리는 퍼머를 한데다 흰색 브라우스에 검정색 스커트 차림이다.
    이젠 완벽한 신식 여성이다.

    「아, 여기 계셨군요.」
    윤병구가 오선희를 보더니 웃음 띤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제가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가면서 말했다.
    「그럼 말씀 나누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