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뼈아픈 자성론을 담은 아사히신문의 칼럼 ⓒ 뉴데일리
“동계 올림픽에서도, 국제회의에서도 일본은 한국에 연패하고 있다.”
일본의 유력일간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한국과의 경쟁에서 잇달아 지는 일본에 대해 뼈아픈 자성론을 내놨다.
신문은 6일자 정치칼럼에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에 완패했지만 실은 또 다른 경쟁에서도 일본은 한국에 패했다”라며 “G20 서울 정상회의와 요코하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의 개최 순서가 그것”이라고 밝혔다.
신문은 “11월 열리는 2개 회의를 먼저 개최하기 위해 양국 간에 치열한 외교공방이 있었지만 결과는 한국 측의 승리”였다며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의 진두지휘 아래 오바마 대통령 등과 직접 절충을 벌인 결과, G20 정상회의가 먼저 열리게 되었고 하토야마 총리도 선전하였으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고 적었다.
이어 “일본은 G20이 먼저 열릴 경우 APEC이 빛이 바랜다고 노심초사 했지만 한국은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밝히고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직접 담판했고, 이 대통령의 측근도 미국 재무성을 활발히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또 “한국은 경제회복이 진전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순조로우며 국제사회 발언권도 확대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국의 김연아 선수에게 패한 아사다 마오 선수가 4년 뒤 소치에서의 설욕을 위해 시동을 걸었다. 하토야마 정권에게도 아사다에 못지않은 분발을 기대해 보지만, 글쎄...”라고 끝을 맺었다.
다음은 아시히신문의 칼럼 전문을 번역한 것이다.일본, 올림픽-국제회의에서 한국에 연패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한국과 일본의 실력차가 두드러졌다. 한국은 금메달 6개를 비롯, 14개의 메달을 딴 반면, 일본은 은3, 동2을 따는데 그쳐 크게 뒤쳐졌다. 그런데 실은 또 다른 경쟁에서도 일본은 한국에 패했다. G20 서울 정상회의와 요코하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회의(APEC) 정상회의 개최 순서가 그것이다.
11월 열리는 2개 회의를 먼저 개최하기 위해 양국 간에 치열한 외교공방이 있었다. 결과는 한국 측의 승리였다. G20이 11월 11일 전후로 결정돼 13, 14일의 APEC 에 앞서 열릴 전망이다. 한국은 이명박 대통령의 진두지휘 아래 오바마 대통령 등과 직접 절충을 벌인 결과, G20 정상회의가 먼저 열리게 됐다. 하토야마 총리도 선전하였으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 후텐마 미군비행장 이전문제 등 최근의 미일관계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으로서는 리먼 브라더스 사태이후 정책협조의 장(場)으로서 위상이 높아진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 개최가 숙원이었다. 미국, 유럽, 일본 주도의 G8 정상회의에 대한 대항의식도 강했다.
G20 회원국 중 한국,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9개국이 APEC 회원국이어서 일본은 “G20이 먼저 열릴 경우 APEC이 빛이 바랜다”고 노심초사 했다. 그러면서도, 11월 11일이 미국 ‘재향군인의 날’이어서 군(軍)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에 역대 대통령이 이날 국내행사에 대부분 참석해 나라를 비운 전례가 거의 없었던 점에 기대를 했다.
그러나 한국은 매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한일 외교관계자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과 직접 담판했고, 이 대통령의 측근도 미국 재무성을 활발히 접촉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기감을 느낀 하토야마 총리도 외상과 대응책을 고심했다. 일본 정부 고위관리가 주일대사를 지낸 유명환 외교장관에게 APEC을 먼저 개최할 수 있도록 간청하는 장면도 목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의 페이스에 무너졌다. 하토야마 총리도 오바마 대통령에게 직접 협조를 구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최근의 미일관계에 비추어 미국 측이 입장을 변경할 가능성이 적다는 측근의 판단에 따라 포기했다. “후텐마 문제가 뒤틀려 있는 와중에 미일 양국이 협력할 환경이 아니다”고 고위 외교관이 설명했다.
한국은 경제회복이 진전되고 있고 미국과의 관계도 순조로우며 국제사회 발언권도 확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 난항에 지속적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양국의 이러한 차이가 G20와 APEC 개최순서 공방에서도 드러났다.
한국의 김연아 선수에게 패한 아사다 마오 선수가 4년 뒤 소치에서의 설욕을 위해 시동을 걸었다. 하토야마 정권에게도 아사다에 못지않은 분발을 기대해 보지만, 글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