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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93호인 경기도 구리시 東九陵은 조선조 初代 왕인 太祖의 健元陵을 조성하면서 王陵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동구능은 9개의 능에 아홉 명의 왕과 여덟 명의 왕후를 모셨다.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만들어진 59만 평의 境內이다. 東九陵이란 명칭이 사용된 것은 翼宗(익종)의 綏陵(수릉)이 들어선 1855년부터이다.
健元陵은 언덕 위에 조성되었는데 쳐다 보면 높게 보이지만 陵 자체는 왜소한 느낌을 준다. 특히 경주에 있는 신라 왕들의 무덤에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조선의 건국자 태조 李成桂(1335-1408, 在位7년)를 묻은 건원릉은 그 이후 왕릉의 표준이 되었다. 봉분 앞 중앙에 床石과 長明燈을 설치하고 양 옆에는 한 쌍의 望柱石을 두었다. 한 단 아래의 좌우에 文人石이 石馬를 이끌고 있고, 그 아래 단에 역시 좌우로 武人石이 石馬를 뒤에 거느리고 있다. 능 아래의 碑閣 안에 태조의 업적과 명복을 비는 神道碑를 함께 세웠다. 碑를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목을 안으로 움츠려 넣은 모습이다. 경주 태종무열왕릉 앞 碑石을 등에 싣고 있는 돌거북이 목을 하늘을 향하여 세차게 뻗치고 있는 모습과 정반대이다.
조선의 建國 왕과 통일신라의 주인공 무덤이 보여주는 상반된 모습은 바로 조선과 신라의 國格 및 지도층의 정신력 차이를 상징한다.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西岳 古墳群은 左청룡 右백호의 지형을 가진 天下명당이다. 어렵게 風水地理를 들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좌우 능선이 흘러내리는 한가운데 비탈에 일렬로 널어선 다섯 基의 거대한 봉분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든다. 이런 雄渾한 氣像을 東九陵에선 찾을 수 없다. 한 바퀴 구경하고 나올 때면 뭔가 답답하고 편하지 않는 마음이다. 明에 대한 사대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임금의 능을 지을 때에도 중국의 황제 능보다 작게 지어야 하였을 것이다. 大國 눈치보기가 시작된 것이다.
조각가 권진규는 古代 미술품을 평하면서 "신라는 위대하였고, 고려는 침체되었으며, 조선은 형해화되었다"는 비교를 하였다. 태종무열왕 碑石의 돌거북은 위대하고, 조선조 태조 신도비의 돌거북은 안으로 움츠려 들었다. 세계제국 唐과의 결전을 선택하여 한민족을 지켜냈던 자주와 개방의 나라 신라의 정신과 위화도 회군으로 建國된 조선의 對內지향적 사대주의 정신을 當代의 조각품들이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시대정신의 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