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해군이 새로운 교전규칙에 따라 신속히 대응한 결과 NLL을 침범하고 우리 측에 조준사격을 기도한 적(敵)을 단 2분만에 제압했다. 역시 김대중 노무현 세상과는 다르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이러한 군(軍) 대응은 기실 당연 이상의 당연인데도 그것을 새삼스럽게 잘한 일이라고 치하하게 된 것 자체가 지난 10년 동안 세상이 얼마나 잘못 됐던가 하는 것을 반증한다 하겠다. 정권 교체를 못했더라면 정말 어찌 할 뻔 했나 하는 서늘함이 가슴을 스친다.
     일부에서는 적이 왜 그런 도발을 했나 분석하면서 북이 최근의 대화 분위기로 혹시 내부기강이 이완될까 우려해 그랬을 것이라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런 증명될 길 없는 가설을 내 세울 것 없다. 중요한 것은 적이 도발을 했고, 도발을 하면 단호히 응징, 격퇴, 괴멸 시킨다는 대원칙 하나다.

      군사적 도발은 보다 월등한 군사적 대응으로 제압한다는 것이면 되었지, 거기에 무슨 이런 저런 정치적 해설이 필요한가? 군사적 도발을 정치적 계산에 따라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막았던 김대중의 ‘정치’가 웃기다 못해 고약한 것이었다.
     평화 그 자체와, 일부 좌파 프로파간다가 떠드는 ‘평화주의’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니다. 순수한 의미의 평화 유지책은 전쟁을 결코 먼저 도발할 까닭이 없는 사람들이 강력한 전쟁 억지력을 보유하는 것이다. 좌파 프로파간다의 기만적 ‘평화주의’는 좌파의 혁명적 호전성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이쪽의 이념적, 정신적, 군사적 무장만 일방적으로 해제하라고 한다. 여기에, 딱히 좌파가 아닌 멀쩡한 사람들도 곧잘 넘어간다. 특히 좀 배웠다고 자임하는 ‘설 배운’ 친구들이. 그렇게 말을 해 두어야만 ‘진취적인 인텔리’의 자격증을 딸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쟁에 대비한다는 것의 1장 1절은 ‘상무정신(尙武精神)이다. 문약(文弱)과 안일과 두려움이야말로 패배의 길, 노예의 길이다. 인류가 모두 성인(聖人)이 되지 않는 한, 전쟁을 막을 가장 확실한 길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정신적 군사적 역량을 항상 보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