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정부 고관, 외교관, 군부등 총출동

    C. 인물

    일본의 한국병탄에는 많은 인물들이 관여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위시한 관리, 무츠 무네미츠(陸奧光宗)와 고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郞)를 포함한 외교관, 야마가타 아리토모나 가츠라 타로(桂太郞)가 이끄는 군부, 시부사와 에이이치(涉澤榮一)로 대표되는 재계 등 각계각층의 지도급 인물들이 ‘병탄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러나 ‘음모와 조작의 명수’로 알려진 한국주둔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本次郞)가 확언하고 있는 것과 같이 “민간 지사의 헌신적 활동”이 없었다면 병탄 프로젝트는 실패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지연됐을 것이다. 아카시가 지적하고 있는 ‘민간 지사’는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를 의미하고 있다.

    거무줄을 팔방으로 친 막후의 거대한 그림자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 병탄의 막후 조종자
    ‘정계상층부를 자유롭게 드나든 저명한 정치낭인’, ‘정계를 유영(遊泳)하는 책사’, ‘정보의 집결소’, ‘흑막의 인물’, ‘지사’ 등으로 알려진 스기야마 시게마루는 정계의 막후 인물로서 역사적 계기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한 외교사학자는 스기야마를 가리켜 “얼굴을 숨기고 도쿄[帝都] 중앙에 뿌리를 내려 때로는 거미처럼 지하로 잠적하고, 때로는 토굴을 나와 거미줄을 팔방으로 넓히고, 천하대사가 있을 때마다 항상 무대 뒤에 숨어서 능숙하게 많은 것을 조종하고 해결”하는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일청전쟁에서 시작하여, 러시아의 대전을 거쳐, 한국병합을 만들어 내기까지 최근 20년의 역사에서 오직 무대 전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만 보았지, 배후에서 이들을 움직이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는 보지 못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바로 스기야마 시게마루다.
    그는 “공명이 안중에 없고, 허영의 질곡에 초연”하며, 제국 건설을 보지 못하고 “한을 품고 세상을 하직한 지사”들을 위로하고 나라의 부강만을 탐하는 철저한 국권확장론자였다. 그는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지배해야하고, 이를 위해서 민관군은 힘을 합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스기야마는 유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의 집에 학교[家塾]를 열고 젊은이들을 가르친 그의 아버지는 미도(水戶)학파의 유학자로서 철저한 근황파(勤皇派)에 속했다. 시게마루는 아버지 밑에서 한학과 국학을 공부했으나, 근대적 교육을 받은 흔적은 없다. 1880년부터 도쿄와 후쿠오카를 오가며 “사방의 지사들과 교류”하면서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83년부터는 한국의 부산, 인천, 한성을 내왕하고, 김옥균, 송병준 등과도 교류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대륙낭인과는 달리 그는 ‘서양’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자주 돌아보았다. 그는 여행을 통해서 견문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식’을 몸으로 터득했다.

    독학-여행...세계를 누빈 거구의 '해결사'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거대한 체구(키-6척, 몸무게-82kg)를 지닌 스기야마는 천성적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대륙낭인이 국내적 지지 기반이 약한 것과 달리, 그는 각 계의 중요 인물들과 긴밀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대의 최대의 권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물론, 정계, 관계, 재계, 군부의 거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근대적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독학과 여행을 통하여 살아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영어도 ‘비교적’ 자유로웠다. 1888년 이후 일 년에도 몇 차례씩 홍콩을 오가며 영국의 재정운영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1897년 이후에는 미국도 자주 내왕했다.  또한 빠른 판단력과 추진력을 가진 그는 ‘해결사’로서의 천부적 자질을 갖추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1900년 처음으로 정당(정우회) 내각을 꾸리면서 스기야마에게 경시총감의 자리를 권유할 정도로 그의 능력을 평가하고 신뢰했다. 물론 스기야마는 고사했다.

    스기야마는 대륙낭인의 대부인 도야마 미츠루로부터 많은 영양을 받았다. 그와 함께, 또는 그의 지시를 받아서 크고 작은 많은 사건을 막후에서 조종했다. 그는 도야마가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후배였고, 두 사람의 관계는 ‘물과 고기’와 같았다.

  • ▲ 도야마 미츠루와 스기야마 시게마루(왼쪽).
    ▲ 도야마 미츠루와 스기야마 시게마루(왼쪽).

    스기야마도 겐요샤의 중요한 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조직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했고, 명분이 있는 일이라면 재계나 정부의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국, 만주, 대만, 홍콩, 미국을 자유롭게 넘나들고, 공식 직함 없이 일본흥업은행 창립, 대만은행설립, 경부철도회사 설립, 만철 설립과 운영, 철도국유화 등과 같은 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다. 또한 러일전쟁 당시에는 가츠라 다로(桂太郞)수상의 요청을 받아 루즈벨트 대통령과 동문수학한 가네코 겐타로와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모건회사(J.P. Morgan)회사로부터 차관을 얻어 전쟁에 필요한 군수물자를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본격적인 한국병탄을 위하여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일본 최대의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스기야마는 때를 놓치지 않고 고쿠류카이의 우치다 료헤이를 이토의 막료로 추천했다. 그리하여 스기야마는 도쿄에서, 우치다는 한양에서 병탄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는 계기를 열었다. 그 후 1910년 병탄이 완성되기까지 그는 한편으로는 정부의 원로와 중신, 그리고 군부를 움직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고문으로서 병탄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국병탄 후 그는 죽을 때까지 만주와 시베리아로 국력확장을 위하여 진력했다.

    평생을 한일병탄에 바친 '정한론의 괴승'

    다케다 한시(武田之範): 일진회 조종자
    일진회는 일본의 한국병탄을 앞장 나서서 주장한 당시 가장 큰 한국인 민간단체였고, 이용구(李容九)가 그 회장이었다. 일진회로 하여금 ‘합방’을 주도하도록 나서게 한 배후에는 승려 다케다 한시가 있었다. ‘괴승’, ‘걸식방주’, ‘대화상’으로도 불리는 다케다는 그의 생애 최대의 사업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큰 몫을 담당했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다케다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나가오카(長岡)의 조동종(曹洞宗) 전문학교에서 불교를 학문적으로 연구했다. 뒷날 그는 조동종의 명찰이고 호쿠리쿠(北陸) 지방에서 가장 큰 현성사(顯聖寺)의 31대 주직(住職)을 맡았다. 다케다가 10년 동안 사찰을 운영하는 동안 사세는 크게 성장했다.

  • ▲ 일진회 조종자 승려 다케다 한시.
    ▲ 일진회 조종자 승려 다케다 한시.

    다케다는 1863년 구류미(久留米)의 하급무사 사와시 고(澤之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메이지 초기 그의 아버지가 반정부운동에 연류 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그래서 그의 나이 10살에 아버지의 친구이면서 의사인 다케다(武田貞祐)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면서 ‘다케다’의 성을 취했다.
    불우한 그의 소년시절은 그로 하여금 10여 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게 만든다. 1881년 고향을 등지고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난 다케다는 일본 전역을 유랑하면서 사찰을 전전했다. 1883년 현성사에 정착하여 출가하면서 불교 수업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다케다가 아시아 문제, 특히 한국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케다가 이웃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직접적 연유가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다. 다만 ‘방랑시대의 친구’인 세키 쇼기치(關常吉)가 여러 차례 한국의 실상을 설명하면서 ‘정한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케다에게 설명했다. 다케다와 같은 나이의 고향친구인 세키는 뒷날 고쿠류카이의 회원으로 한국병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892년 현성사에서 하산한 다케다는 그 후 상당기간 포교활동보다 사업에 몰두했다. 규슈, 대마도, 부산을 넘나들면서 산림, 개간, 어업 등과 같은 사업을 통하여 ‘일획천금’을 꿈꾸었다. 다케다가 당시 전라남도 순천 앞에 있는 금오도(金鰲島)에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있었던 이주회(李周會: 을미사변당시 명성황후 시해의 한국 측 주범)와 연결되면서 일본측 자본과 어부를 끌어 들여 대대적인 어로사업을 벌렸다. 목적은 보다 활발하고 튼튼한  ‘활동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한국의 실정을 몸으로 배웠고 또한 이주회 등을 비롯하여 많은 한국인들과 인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시나리오에 깊이 개입

    다케다가 한국에 머무르기 시작한 1892년 이후 한국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동학운동, 청일전쟁, 삼국간섭, 민비시해, 아관파천 등의 사건이 계속됐다. 이 격동의 시대에 다케다는 한국에서 활동했다.

    사업에 실패한 다케다는 일본으로 돌아가기보다 ‘조선낭인’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부산의 오자키(大崎正吉) 법률사무소를 근거지로 하고, ‘채권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경성, 경상도, 전라도 등을 여행했다. 전라도에서의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겐요샤가 청나라와의 전쟁을 유도하기 위한 ‘방화역’으로 조직한 덴유쿄의 일원으로 행동에 참가했다. 그 후 덴유쿄가 해체되면서 다케다도 귀국하여 다시 현성사로 돌아갔다. 그러나 산사의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삼국간섭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희망에 부풀었던 일본의 꿈을 산산조각으로 만들었다. 동시에 한국반도에서 일본의 주도권이 러시아로 넘어갔다. 일본도 ‘비상대책’을 강구했다. 그 ‘비상대책’은 한국의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민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일본 정부는 비상대책을 실행할 인물로 미우가 고로(三浦梧櫻)를 선정하고 새 공사로 임명했다. 다케다는 1895년 가을 미우라의 고문격인 정치 소설가이면서 중의원 의원인 시바 시로(柴四朗)의 요청을 받고 현성사에서 내려와 미우라를 동행하여 다시 경성으로 향했다.
    경성에 도착한 다케다는 당시 군부협판의 자리에 있던 이주회와 협력하면서 민비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에서부터 행동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관여했다. 민비시해 후 미우라, 시바 등과 함께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잠시 구속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고, 그 후 정식재판에서도 무죄로 풀려났다.

    다케다가 민비시해 사건에 관여함으로서 대륙진출론자나 조선낭인들 사이에서 그의 명성과 지위가 크게 올라갔다. 특히 미우라 고로, 시바 시로, 다케다 한시 세 사람의 관계는 상당히 가까워졌다. 더욱이 불교에 심취돼 있는 미우라는 다케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1896년 현성사로 돌아온 다케다는 현성사의 말사(末寺) 동림사(東林寺)의 주지로 자리를 잡았다. 동림사를 운영하면서도 다케다는 미우라 고로의 요청에 따라 민비사건에 연루된 한국 훈련대의 우범선, 이두황, 구연수, 황철 등에게 망명처를 제공하고 그들의 신변 보호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림사 주지로 있으면서 다케다는 현성사 사세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다케다는 미우라와 시바의 지위를 활용하는 등 “권력밀착의 특기를 발휘”하여, 현성사 주변의 국유림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관할 영역을 확장했고, 본당을 중축하고, 포교를 확대하는 등 교세를 넓혔다. 점차 교단 내에서 다케다의 지위와 발언권이 강화됐다. 1901년에는 드디어 현성사 31대의 주지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이처럼 젊은 나이에 현성사와 같은 대찰의 주지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이용구 상대역...우치다와 2인3각

    우치다 료헤이가 고쿠류카이를 결성할 당시 다케다도 그 취지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결성 당시 축시도 전했고, 그 후 기관지에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러나 직접 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다케다 한시가 우치다 료헤이와 함께 ‘한국문제’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우치다와 함께 1906년 9월 다시 한국을 찾으면서 부터다.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에 의하여 통감부의‘촉탁’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경성에 부임한 우치다의 역할은 일본의 한국병탄을 “한국인에 의한 합방”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한국의 사정을 조사한 우치다는 일진회가 이 역할을 담당하기에 가장 적절한 단체라고 판단했다. 또한 ‘동학’이라는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상대역으로 다케다 한시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우치다와 다케다는 ‘한국병탄’이라는 문제를 놓고 다시 의기투합했다. 다케다는 현성사의 주지 자격으로 한국을 넘나들면서 조동종을 포교하면서 병탄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했다. 특히 그는 이용구를 설득하여 한국병탄에 앞장서도록 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 냈다.

    냉철하고도 치밀한 리얼리스트...20세부터 6년간 준비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병탄 프로젝트의 총지휘관
    우치다 료헤이는 대륙낭인 2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메이지 초기 일본 사회에 충만해 있던 ‘해외웅비의 꿈’을 체계적인 팽창주의 이론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의 구체적 실천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최전선에서 강력하고도 조직적인 활동을 이끌었다. 그에게서는 초기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볼 수 있었던 감상주의나 낭만주의의 색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실용주의와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일본의 대륙팽창을 위한 계획을 세웠고, 냉철하고도 치밀한 계산 아래 조직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일본의 세력을 대륙으로 팽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대륙웅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한국병탄의 일등공신이다.
    우치다는 후쿠오카의 한 하급무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후쿠오카 일대에서 이름난 검객이었던 아버지는 메이지 유신을 지지하여 이의 성공을 위하여 전쟁(戊辰戰爭, 1867)에 참여했다. 정한론을 열렬히 지지했던 그는 정한파가 주도한 사가(佐賀)의 난과 서남전쟁에 직접 참여했다. 메이지 체제가 안정된 후에도 겐요샤 결성에 앞장서는 등 ‘정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우익활동에 동참했다.

  • ▲ 한일병탄의 총 지휘관 우치다 료헤이.
    ▲ 한일병탄의 총 지휘관 우치다 료헤이.

    그러나 우치다 료헤이는 어려서부터 숙부인 히라오카 고타로(平岡浩太郞) 밑에서 성장했다. 광산업으로 성공한 규슈 제1의 부호이기도 한 히라오카는 자신의 부를 일본의 대륙확장을 위하여 투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중국대륙과 한국으로 들어가 활동하는 많은 대륙낭인들을 지원했고, 겐요샤가 결성되면서 초대 회장직을 맡아 이끌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의원으로 정치권에 진출하여 의회 내에서 겐요샤와 같은 노선을 지향하는 단체나 정치인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히라오카의 직접적 지원을 받는 동안 우치다는 글과 칼을 함께 배웠다. 숙부의 지도에 따라 그는 날마다 겐요샤의 체육관에서 검술과 유도를 익혔다. 또한 가정교사를 통하여 중국의 고전, 일본외사, 18사략 등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히라오카 곁에서 밤늦도록 흔들거리는 촛불 밑에서 논의하는 국권론자들의 대륙웅비의 경륜을 듣기도 했다. 우치다의 표현을 빌리면 히라오카의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칼로 4백여주의 중국대륙을 석권하려는 기개를 가진 지사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사귐은 나에게 대륙을 향한 웅지”를 심어주었다.
    우치다의 나이 20세가 되면서 히라오카의 직접적 후견에서부터 자립하게 된다. 그는 독자적으로 활동 노선과 방향을 정했고, 대륙낭인의 세계에서 점차 명성을 축적해 나갔다. 첫 해외에서의 활동은 청일전쟁의 ‘방화’역이었던 덴유쿄에서의 행동이었다. 청일전쟁과 삼국간섭 후 그는 히라오카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유도도장을 열고 활동의 거점을 마련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간도를 위시한 그 일대를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의 도장은 대륙낭인과 군 첩보원들의 활동 본거지가 됐다.
    우치다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생활을 통해서 러시아의 ‘실체’가 아시아가 아니라 유럽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보다 정확한 러시아의 실상을 알기 위하여 1897년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이르는 긴 ‘조사여행’을 단행했다. 1년 가까이 걸린 이 여행의 결과로 우치다는 그 당시 일본사회에서 러시아 문제에 가장 정통한 인물로 부상했다.
    6년에 걸친 한국, 간도, 만주, 시베리아, 러시아 등의 해외활동을 통해서 쌓아 올린 그의 업적으로 우치다로 하여금 국권주의자로서의 위상과 대륙낭인 세계에서의 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는 보다 구체적 활동을 위한 기반으로서 고쿠류카이(黑龍會)를 결성하게 이르렀다.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민간파트 총사령관

    러일전쟁이 종식되면서부터 우치다는 한국병탄이라는 과업수행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촉탁으로 한국에 머무르면서 스기야마 시게마루를 통해서 일본 내 병탄 강경파인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위시한 군부의 지원을 얻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케다 한시로 하여금 일진회가 일본의 ‘합방’을 지지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도록 조정했다. 우치다는 일본의 한국병탄이라는 프로젝트의 한 가운데서 기획하고 조정한 중심인물이었다. 우치다 료헤이가 없었다면 병탄이 상당히 지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아카시 모토지로의 회고담은 결코 의미 없는 말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