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원우·前 부산 명덕초교 교장 ⓒ 뉴데일리
    ▲ 이원우·前 부산 명덕초교 교장 ⓒ 뉴데일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사흘 전인 20일 오후였다. 나는 김해 노인회 진영 분회의 노인대학에서 '목포의 눈물'을 비롯한 일제 강점기의 우리 노래를 지도하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이 졸업한 대창 초등학교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었다. 물론 박연차 게이트 수사가 한창이라, 그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주일 후 다시 그곳에서 노래 수업을 했다. 추모의 뜻을 담아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 중 노인들에게도 친숙한 노래 '부산 갈매기', '외나무다리',' 허공'을 골랐다. 인터넷을 뒤져 찾아냈다. '상록수'는 악보를 구할 수가 없어 빠졌다. 칠판 한쪽에 고인을 애도하는 글귀도 적어 보았다. 10년 전 부산 강서노인학교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당시 국회의원에 출마한 노 전 대통령과 초임 교장이던 나는 그곳에서 나란히 '외나무다리'를 불렀다. 진영 노인대학에서 노래 수업을 하는 동안 나는 만감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실망스럽게도(?) 노인 학생들은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동향인, 그것도 대통령을 지낸 분의 급서(急逝)로 인한 충격이 작지 않을 텐데 말이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데, 몇몇 할머니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자살은 안 되지…. 어린 청소년들이 본받을까 봐 두렵소."

    그런 의미에서 보면 5월 30일자 A26면 시론 '슬프다, 슬프다, 슬프다'의 필자는 언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물론 필자의 참뜻은 마지막 문장에 압축된 대로 "죽은 뒤 그 관을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의 청탁(淸濁)에 의해 역사가 평가를 내린다"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지금 슬프다. 슬프다 못해 노 대통령을 따라 죽고 싶다"라는 표현은 안 된다. 물론 갑남을녀(甲男乙女)도 그 말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고인의 떠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던 여대생이 스타킹으로 목매 자살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벼랑 끝에 선 사람이 이런 정황을 접하고 모방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또 하나, 고인에 대한 예우 차원이라고 해도 '~께서' '세상을 버리셨다' 등 지나친 경어 사용이 거슬린다. 공적인 글에서 경어 사용은 거듭 신중을 기할 일이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는 다른 의미에서 이 땅에 사는 많은 젊은이에게 전하는 메시지 또한 담겨야 한다. '자살'은 분명히 죄라는…. 어떠한 명분으로도,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고인의 염원 중 하나가 지역주의 타파였으니 영호남을 번갈아 넘나들며 '목포의 눈물'이나 '부산 갈매기'를 부르고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선일보 6월3일자 '편집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