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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논란에 대해 이용훈 대법원장이 '엄중 경고'를 하고 신 대법관이 공식사과했음에도 14일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 80여명과 서울남부지법 31명이 판사회의를 강행했다. 남부지법 판사들은 회의 후 "신 대법관 행위는 명백한 재판권 침해로 위법하다"는 발표문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은 "대법관 업무수행이 적절치 않다는 의견이 다수였다"고 밝혔다.
이번 '신영철 파동'의 핵심이 사법 행정권에 의한 재판독립 훼손에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2006년 2월 9일 이용훈 대법원장이 각급 법원 부장판사들을 대법원장 공관에 모아놓고 "기업인 비리 재판에서 국민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 발언을 했다. 하루 전 2월 8일 서울중앙지법이 회사 돈 286억원을 횡령한 대기업 오너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자 이를 질책한 발언이었다. 당시 재판장은 공관 모임에 참석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 대법원장의 경고는 신 대법관의 '재판 신속진행 촉구' 이메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강도의 재판 관여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이 대법원장의 발언을 놓고 불평불만을 표시했던 판사는 없다.
이번 재판 개입 논란을 촉발시킨 사람은 작년 10월 촛불시위 관련 재판에서 집시법의 '야간 옥외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한 판사다. 그는 작년 7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의 조직팀장에 대한 공판에서 "개인적으로 법복을 입고 있지 않다면…" "(촛불시위의) 목적은 숭고하다"는 말을 했다. 그는 지난 2월 사표를 내면서 "내 생각들이 현 정권의 방향과 달라 공직에 있는 게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사표 직후 판사들이 신 대법관의 이메일을 언론에 유출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법원 내부 통신망에 신 대법관을 몰아세우는 글을 올린 사람들 가운데 특정 이념 성향을 갖는 '우리법 연구회' 판사들이 많다고 한다. 지금 사법부에선 정치사건·이념사건 판결에서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부류의 판결 흐름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판사들이 다양한 시각을 가질 수는 있지만 이념과 성향에서 확실한 색깔을 가진 판사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대법원 윤리위원회는 신 대법관 행동에 대해 "사법 행정권의 일환이었지만 외관상 재판 관여로 인식되거나 오해될 수 있는 부적절한 행위"로 규정했다. 신 대법관으로선 일단 후배 법관들이 공격한 수준의 재판권 침해는 아니었다는 판정을 받음으로써 최소한의 명예를 지켰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 대법관은 사태를 불러온 당사자로서 최소한의 책임 있는 행동이 무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윤리위 판단대로 신 대법관의 행동거지가 신중하지는 못했지만 소장 법관들이 모여 성토대회를 한다, 연판장을 돌린다 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다. 다른 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억측을 불러올 수가 있다.
사법부를 이끌어가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선 젊었을 적 익힌 법전(法典) 실력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 법관으로서 오랜 마음의 수련과 판결 경험을 쌓아 법률 지식은 물론 균형된 감각도 갖추고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상급심을 맡아 전체 사법부의 판결 방향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소장 판사들이 수(數)의 힘으로 법원 지도부를 몰아붙이고 선배 법관을 무릎 꿇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법원의 이런 시스템을 무너뜨리겠다는 것과 같다. 그건 대학 연구실에서 지도교수를 제쳐놓고 석·박사 과정 학생들이 투표로 연구방법과 연구이론의 방향을 결정짓겠다고 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소장 판사들이 자기들 손으로 법원의 권위를 허물면 언젠가는 자기들 어깨를 집어넣어 무너지는 법원을 지탱해야 할 날이 올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