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 뉴데일리
    ▲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 ⓒ 뉴데일리

    두 사람이 만났다. 때로는 ‘뉴-라이트 운동의 대표적 이론가’로 평가받고, 때로는 ‘한국 역사학계의 이단아’로 비난받는 두 사람, 한국경제사학계의 원로 안병직 선생과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이영훈 교수. <대한민국, 역사의 기로에 서다>는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들며 벌인 안병직과 이영훈의 깊고 폭넓은 대화를 책으로 묶은 것이다. 류근일·홍진표 대담, 이석연·강경근 대담에 이어 기파랑 출판사 대담총서 세 번째 책이다.   

    역사에 대한 묵직한 성찰과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이 돋보인다. 마르크스주의자에서 뉴-라이트 사상가로 진화해 온 두 사람의 개인적 고뇌와 방황이 담담하게 펼쳐져 읽는 맛을 더한다. 김문수 경기지사, 김수행 교수, 박성준 교수(한명숙 전 총리 남편), 김근태 의원 등 안병직 선생과 함께 젊은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의 일화가 간간이 섞여 있는 것도 흥미롭다.

    탄탄한 역사적 실증을 바탕으로 과거사청산운동을 둘러싼 역사논쟁을 정면으로 비판함으로써 독자들을 숨 막히는 긴장과 흥분 속으로 몰아넣는 대목도 있다. 무엇보다도 깔끔하게 정돈된 뉴-라이트 운동의 핵심 주장과 논리를 만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있거나 한국사회의 미래를 걱정하는 독자들이 탐낼만한 책으로 손색이 없다. 어떤 독자들은 다가올 대선에서 합리적 선택을 위한 지침서를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미덕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쉼 없이 흘러온 한국지식인의 삶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안병직 선생은 한때, 조직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였고 이영훈 교수는 대학시절, 행동하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안병직 선생은 머리말에서 ‘나는 정신적으로 수없이 방황했다’고 고백한다. ‘어제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은 옳지 않았고, 오늘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일은 옳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안병직 선생이 살아온 70평생은 격변의 시대였다. 태평양전쟁, 해방, 건국, 한국전쟁, 4.19학생의거, 5.16군사정변, 5.18광주, 그리고 6월 항쟁과 6.29 선언 등이 숨 쉴 틈 없이 이어졌다. 고려와 조선 1천년 동안 일어난 변화보다 지난 100년의 변화가 더 크고 격렬했다. 하늘은 땅이 되고, 땅은 바다가 되었다. 일체의 가치관과 생존방식이 통째로 달라지는 역사의 격량 앞에서 ‘정직한 지식인’들이 ‘정신적 방황’을 피할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이 영훈 교수의 인생도 출발이 늦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스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두 정직한 지식인은 정신적 방황과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역사에 대한 애정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대화 속에 우리가 이룬 것들, 한국사회가 성취한 것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혼란의 시대를 넘어 다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엿보인다. 한국사회의 도약을 위해 힘을 보태야 한다는 다짐이 녹아 있다. 평범한 스승과 제자에서 이제 뉴-라이트 운동의 동지로 다시 만난 안병직 선생과 이영훈 교수. 그들의 대담에는 인간과 역사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듬뿍 담겨 있다. 이 책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일본에서 교수로 계시다가 갑자기 귀국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대담은 이영훈 교수가 불쑥 던진 질문으로 시작된다. 안병직 교수는 2001년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후 일본 후쿠이 협립대에서 경제학부 특임교수를 맡고 있었다. 후쿠이 현립대와의 계약이 만료되는 2006년이 다가오자, 일본의 유명 사립대에서 선생을 초빙했지만, 선생은 2006년 일본에서의 교수 생활을 정리하고 돌연 귀국했던 것이다.
    “한국이 정치적으로 너무나 혼란스럽고 위험했습니다. 집권당의 국정방향이 한국 근·현대사의 기본흐름에 역류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전공자로서 국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일조하고 싶었습니다.”

    안병직 선생은 젊은 시절 사회운동을 통해 세계관을 세우고 학문을 연마했다. 그의 의식 밑바닥에는 애국심과 국가발전에 대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을 터이다. 그 때문인지, 안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자신의 사회이론을 버렸음에도, 늘 한국의 정치와 사회흐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사회가 역류하고 있다고 판단되자 곧바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귀국과 동시에 뉴-라이트 운동의 기치를 든 주요 인사들을 만나고, 뉴-라이트 사상지 발간을 준비했다. 두 사람의 대담이 시작된 2006년 6월은 안병직 교수가 뉴-라이트 사상지 <시대정신(時代精神)>의 편집위원장을 맡아 재창간 1호를 낸 직후였다. 1980년대 사상적 전향과 함께 평범한 역사학자로 돌아갔던 그가 실천적 사상운동가로 다시 돌아온 순간이었다.

    안병직 교수가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진보학자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모택동이론을 한국사회에 적용한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내놓으면서부터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자립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이론이었다. 안 교수의 이론은 한국사회운동에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안 교수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스스로 폐기하고 ‘중진자본주의론’을 들고 나타났을 때, 그는 존경받는 진보학자에서 ‘변절자’로 전락하고 만다.

    제1부 사상의 편력에는 안 교수가 전향하게 된 이유와 과정도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안 교수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자신의 이론에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한국경제는 파탄이 아니라 오히려 급속히 성장한 것이다. 식민지 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그는 당황했다. 그러던 중, <역사평론(歷史評論)>에 실린 나카무라 사토루(中村 哲)의 「중진자본주의론」을 접한다. 안 교수는 제3세계에서도 자립적인 자본주의의 성립이 가능하다는 나카무라 교수의 주장에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나카무라는 논문에서 지금은 세계자본주의의 제3파동기이고, 사회주의는 미래가 없으며, 앞으로는 NICs(신흥공업국가)에서 자본주의가 활발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사회 현실과 깔끔하게 맞아떨어지는 이론을 만난 것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제3세계 경제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면서 안병직의 역사관은 뿌리부터 달라졌다.

    전향한 안 교수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흔쾌히 동의하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마지못해 설득되는 사람도 있었으나 많은 사람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안 교수는 외로움을 느꼈다. 다행히 한국경제사를 연구하는 제자들 중에는 협력해주는 사람이 많아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영훈 교수는 안 선생보다 먼저 사회주의운동가의 길을 벗어났다. 노동자 계급의 삶이라는 것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방대한 역사적 사료와 함께 숨 쉬며 생활했던 성실한 학자, 이영훈에게 좌파지식인들의 추상적 논쟁은 공허했다. 이 교수의 전향은 안 선생에 비해 상대적으로 긴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진행된 것이었으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던 봉고차 안에서 이영훈은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명성을 얻었던 당대 대표적 좌파지식인 박현채 선생에게 "저 도시의 불빛을 보십시오. 저것이 어떻게 신식민지입니까.”라며 도발했다. 박현채 선생은 격렬하게 화를 냈다. 독서 모임에 나오지 않는 동료가 걱정되어 찾아갔을 때, '자본론'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토론할 수 없다는 말에 이영훈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의 김수행 교수가 당시 조교로서 나의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형제간 같았지요. 어느 날 김 교수가 “형님, 이거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당황하고 있어요. 그의 연구실에 가보니, 북한에서 깨알 같은 한글로 출판된 레닌선집과 혁명을 선동하는 소설들이 가득 쌓여 있는 겁니다. 직감적으로 통혁당의 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짓은 정말로 영창감이라는 것을 김수행에게 단단히 일러두고, 그것들을 모두 교직원 변소에 처넣어 버렸습니다."
    안병직 교수가 서울대에서 학생운동에 몸담고 있던 시절, 통일혁명당 총책 김종태의 동생 김질락이 찾아왔다. 안 선생과 선을 대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안 선생은 김질락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안성생과의 접촉이 여의치 않자 통혁당은 신영복과 박성준이 주도하던 경제복지회(經濟福祉會)를 끌어들인다. 대담에서는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들이 흥미롭게 이어진다.

    이 책에서 특히 제1부 「사상의 편력」이 유별나게 눈길을 끄는 이유는 두 사람의 순진할 정도로 솔직한 개인사의 회고가 주는 진정성 때문이다. 안병직 선생은 일제시대 척박했던 삶과 해방 전후 시기의 풍경을 담은 일화들을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와 독자에게 펼쳐 보인다. 낡은 사진첩을 보는 듯한 감동이 있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계기, 김근태, 신영복, 김문수와의 만남, 서울대 내 통혁당의 활동과 평가,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장하게 된 과정과 사상전향의 동기, 박현채 선생과의 인연, 그리고 낙성대경제연구소를 세우게 된 배경 등도 소상하게 들려준다.

    이영훈 교수 역시 자신이 경험했던 학생운동의 일화들을 중간 중간 들려준다. 학생 시절 이채언 교수와 함께 페인트 공장에 위장취업했던 시절의 일화들, 교련반대 데모로 제적당했던 사건, 규장각의 방대한 역사적 기록에 앞도당하여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포기한 경험, 대학 시절 운동선배이자 스승으로서 만났던 안병직 교수에 대한 기억 등, 진솔하고 생생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비록 두 사람의 개인사이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는 일화의 차원을 넘어 파란만장했던 그 시대 지식인사회의 지형을 이해하는 계기를 만난다. 

    두 사람은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경제사학자다. 방대한 분량의 통계와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조선사회와 일제시대를 민족사관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이른바 낙성대학파 학자들이다. 제2부와 3부는 경제사학자들의 대담답게, 한국경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폭넓은 토론이 펼쳐진다. 한국경제가 발전해온 양상과 원인, 자본주의맹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을 둘러싼 두 학자의 견해와 논리, 일본 제국이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 해방 이후 우리 경제의 발전 전략과 그 내용에 대한 평가 등이 촘촘하게 이어진다.
    우선 눈에 띠는 것은 한국경제 성장의 원인에 대한 학문적 성과다. 1980년대 경제사학계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경제성장의 원인을 규명한 것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OECD에 가입한 선진국 상호간에 늦게 출발한 후발국의 경제성장률과 소득수준이 먼저 출발한 선발국을 따라잡는, 곧 캐치-업 하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두고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 캐치-업 현상의 기본 원인은 한마디로 기술과 지식의 국제 이동이었다. 1910년대에 무역이 GDP(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 1940년이 되면 56%로 증가한다. 1980년대가 되면 무역의존도가 무려 70%에 육박한다. 지난 130년간 한국의 경제성장의 역사는 한마디로 개방의 역사였다. 개방체제는 경제성장의 동력인 선진국의 기술과 지식을 이전 받을 수 있는 배경인 셈이다.

    특히, 독자들의 눈길을 끌 내용은 식민지 시대에 대한 역사적 서술과 평가다. 두 역사학자는 일본 제국이 조선에 이식한 근대의 형태와 내용을 다각적으로 그린다. 신분제도가 사라지고, 시장경제의 기초가 되는 사유재산제를 보장하는 근대민법이 제정되고, 방대한 산업시설과 자영업자들이 크게 늘어나며, 근대교육과 행정 시스템이 이식되는 과정을 조목조목 짚어 낸다. 두 사람의 대화는 탄압과 수탈이 전부였다고 알고 있던 우리의 역사인식과 거세게 충돌한다. 민족사관을 신앙처럼 여기던 사람들은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것이다. 두 경제사학자에 대한 분노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안 교수는 말한다.
    “한국근대사 연구의 근본 문제는 경제와 윤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경제는 어디까지나 경제 논리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윤리는 별도로 윤리적으로 따져야지요. 이 둘을 섞어 놓으니 혼란만 일어나는 겁니다. 예컨대 식민지기에 경제성장이 있었다 하면, 제국주의를 미화하자는 것이냐고 비판합니다. 이렇게 되면 사실과 윤리는 구별될 수 없고 역사학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민족 감정을 앞세워 학문의 객관성을 훼손할 수 없다는 학자적 양심에서 나온 말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앞에서 치미는 충동과 분노를 이겨낸 독자는 이들 대담을 통해 우리 역사를 좀 더 냉철하고 정확하게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될 것이다.

    제4부는 과거사청산운동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역사전쟁을 다룬다. 물론, 이 전쟁은 학술 논쟁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은 현재 기존의 네 기구를 포함하여 16개 위원회와 600여 명의 전문 인력, 그리고 1,800억의 예산으로 과거사청산작업을 추진 중이다.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할 과제를 정부가 나서 이념 문제로 비화시킨 숨은 동기를 두 대담자는 비판한다. 안 교수는 지난 2년간 몇 백 억의 예산을 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이 ‘사업’을 차라리 국사편찬위원회에 일임했다면 예산도 3~5억 정도면 충분했으리라 가늠하면서 사료의 가치나 쓰임새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 자의 잣대를 가지고 이미 오래전에 죽어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자들을 일방적으로 처단하는 법리적 모순을 꼬집기도 한다. 

    이영훈 교수는 정신대는 위안부가 아니라고 말한다. 정신대는 1944년 일본에서 공포된 정신대근로령에 따라 산업시설에 동원된 여성노동자들일 뿐,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처절한 운명에 놓였던 일본군 위안부는 1930년대 초부터 있었으며, 인식약취, 취업사기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일본군의 위안부 활동을 하던 여성들이지, 노동을 목적으로 징용된 정신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일본정부나 총독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군인을 징병하듯 위안부의 충원에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을 증명한 근거는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 두 사람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두 사람의 대담에 끼어들어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5부는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과 과제, 그리고 한국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고 있다. 안병직 선생은 이제 한국사회는 선진화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를 포함한 모든 방면에서 한국사회의 질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자는 것이다. 사회발전의 지표는 ‘기회의 개방, 관용, 경제적 및 사회적 유동성, 공정성, 그리고 민주주의’이며, 이러한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혁명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교육개발은 반드시 경제성장에 의하여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안병직 선생의 선진화론에 따르면, 당분간 연평균 6% 정도의 고도성장을 계속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현재 세계 30위 수준의 1인당 소득수준을 10~20위권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3만 달러는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향후 10년간 세계 평균성장률의 1.5배에 해당하는 6% 정도의 고성장을 이어가야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남북문제로 인한 이념적 갈등과 국가체제를 둘러싼 정치적 혼란, 무질서한 노사분규를 그냥 두고서는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 안병직 선생의 현실 진단이다. 우선 이런 문제들을 잠재울 수 있도록 국가체제의 이념을 분명히 하고 사회적 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국민들을 선진화의 방향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다. 그가 뉴-라이트 운동에 뛰어든 것도 결국, 선진화의 정치적 사회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대담 첫날 안병직 선생은 노무현 정부를 한마디로 평가하고 전망했다. “노무현 정부는 방향을 잃어버린 무능한 건달 정부입니다. 곧 급전직하할 것입니다.” 그의 주장대로 노무현 정부와 이른바 386 세력의 국민적 지지도는 크게 약화되었다. 급격한 정세 변화를 타고, 경제사학계의 대표학자이자 뉴-라이트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인 두 사람의 철학과 이론이 다음 정부의 정치노선과 정책으로 반영될 수 있을 것인가? 요모조모 따져가며 답을 찾아보자. 좀 더 흥미로운 독서가 될지도 모른다.

    하나 더 있다. 한국경제의 발자취를 다루고 있는 2부 ‘근대의 태동’ 편과 3부 ‘최빈국에서 중진국으로’ 편은 까다로운 학문적 주제와 관련된 내용이 많다. 일반 독자들에게는 자칫 어렵고 지루할 수도 있다. 따라서 내용을 따라잡기가 다소 벅차다고 생각되는 독자들은 이 부분을 건너뛰거나, 맨 마지막에 읽는 것도 방법이다. 자칫, 경제사적 전문용어와 학술 수준의 해석에 걸려 넘어지면, 정작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내용을 다룬 4부와 5부를 읽기도 전에 손에서 놓아 버릴지도 모른다.

    기파랑 펴냄, 344쪽,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