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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이하 연준) 의장이 내년 미국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내면서 미국 금융시장이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았으나 고용 및 소득 전망이 악화되고 있는데다 AIG 등 공적자금이 투입된 회사의 '도덕적 해이'까지 불거지면서 미국 사회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버냉키는 연준 의장으로서는 22년만에 처음인 CBS방송 '60분(60 minutes)' 프로그램에 15일 출연, "금융시장에서 확실한 진전이 일부 나타나고 있다"며 "미국 은행 시스템이 개선되면 경기침체에 대한 전망은 올해 안에 끝나고 내년부터 경기회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버냉키 의장은 "미국이 비록 '경제 불황(depression)'으로 갈 위험은 막아왔지만 금융위기를 해결할 '정치적 의지(political will)가 부족하다"며 "미국 납세자들 돈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에 빠진 금융회사들에 대해 구제금융을 하는 데에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있다"며 미국내 반대여론 고조에 대해 큰 우려를 나타냈다.
'월가(Wall Street)'에서는 이번 버냉키 의장 인터뷰가 다분히 계산되고 의도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실제로 버냉키는 AIG 문제에 대해 "왜 다수의 미국인들이 분노하며, 거대 은행의 잘못된 투자결정을 바로잡기 위해 피땀흘려 일한 납세자의 돈을 쓰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사실도 이해한다"고 전제, "하지만 불을 낸 이웃에 화를 내기 전에 일단은 먼저 불을 끄는 것이 순서"라며 구제금융의 당위성을 부각시켰다.
지난 주 티모시 가이트너 재무장관에 이어 버냉키, 로렌스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과 데이비드 엑셀로드 수석고문이 잇따라 인터뷰를 가진 것은 '월가'에 대한 미국인들의 분노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백악관의 위기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15일 "은행에 대한 분노가 자칫 은행을 정상화시키려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정책에 대한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며 오바마 행정부 내의 위기의식에 대해 부각시켰다.
그 뿐만이 아니다. 버냉키는 '경제 대통령' 이미지를 의식한 듯 격의 없는 인터뷰 태도로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평상복 차림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고향마을을 방문한 데 이어 하버드대 합격 당시 레스토랑에서 파트타임 일을 했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높아지는 실업률에 대해 걱정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해법에 있어서는 전문가들의 관측이 엇갈리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은행 대출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에 묶어두고 있는 연준은 17일부터 이틀간 정책결정기구 '연방공개위원회(FOMC)'를 열어 18일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월가'에서는 일단 연준이 연말까지 대출금리를 사실상 '제로'에 가깝게 유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연준이 신용경색 및 자금압박에 대한 '숨통'을 트게 했다는 데에는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지만 극도의 경제불황 속에서 시장은 여전히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지난 1월 집행부 회의에서 장기 유가증권을 매입, 모기지 대출금리를 낮추는 방안을 제시한 데 이어 미국 내 양대 모기지업체인 페니메이와 프레디맥이 발행한 보증채권을 사들이는 프로그램도 발표했다.
그러나 이같은 처방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금융시장은 여전히 불안감에 휩싸여있다.
버냉키의 '낙관론'과 달리 서머스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다소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서머스는 최근 A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가 바닥을 쳤다는 주장에 대해 "누구도 그런 판단을 내릴 수는 없다"며 "미국 경제가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버냉키와 다른 입장을 나타냈다.
일부 '월가' 금융 전문가들은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정부의 역할 확대를 주문하고 있다.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인 앤드류 틸튼은 16일(현지시간)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정부 세입 및 세출에 있어서 대규모 팽창(massive expansion)이 이루어져야 금융시장이 풀릴 수 있다"며 구체적으로는 6000억 달러 규모의 모기지담보증권 매입을 더욱 확대하고, 금융산업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을 더욱 늘릴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같은 처방으로 과연 미국 금융시장이 안정될 지는 미지수다. 대다수 '월가' 전문가들은 고용전망 및 소득증가에 대한 기대 없이는 소비 및 투자가 살아나지 않을 것이라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확대 및 시장개입에 보다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회사들의 '도덕적 해이'로 인해 미국민들의 여론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어 정부의 역할이 갈수록 한계에 봉착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같은 여론의 미묘한 흐름을 의식한 듯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6일, 1천800억달러에 달하는 천문학적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보험회사 AIG가 간부들에게 거액의 보너스를 지급하기로 한 것에 대해 "화가 나고 말문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는다"며 "이것은 단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가치 문제"라며 AIG의 '도덕적 해이'를 질타했다. 더 나아가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AIG의 보너스 지급을 저지하고 미국인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