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 하루는 좀 남겨놓지…"

    24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에 선대위원장 자격으로 참석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각 시도 선거구별 상황판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진 것을 보고 반농담으로 던진 말이다. 5선(지역구 4선)의 강 대표의 명패가 십수년간 지켜온 자리는 이날 새롭게 공천받은 이종현 후보 이름으로 교체돼있었다.

    공천갈등 가운데 거센 책임론에 직면했던 이방호 사무총장은 선대본부장으로서 자리했으며, 강 대표가 "내 이름이 언제 바뀌었나"는 '섭섭함'을 나타내자 "세상 인심이…"라고 말을 받았다. 강 대표는 직접 안상수 원내대표, 이한구 정책위의장, 정몽준 김학원 전재희 최고위원 등 선대위부위원장단을 소개하면서 "박수쳐라" "왜 반응이 없나"며 분위기를 이끌었다.

    강 대표는 비장한 모습으로 "내가 희생하면서 이제 모두 단합해서 출정했으면 좋겠고 그렇게 되리라 확신한다"면서 "이번 선거는 정권교체를 제대로 마무리하는 선거다. 대통령만 당선됐다고, 큰 머슴만 뽑았다고 일을 잘 할 수 없는 만큼 뒷받침해주는 과반수의 국회의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이 일할 수 있도록 국민이 지원해줄 것을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날 불출마를 전격 선언했던 강 대표는 당 지도부를 겨냥해 강도높은 비난을 쏟아낸 박근혜 전 대표의 기자회견과 총선 후보 55명이 이상득 국회부의장 불출마를 요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말 그대로 전격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한 측근은 전했다.

    강 대표측은 이명박 정부의 안정적 운영을 위한 과반의석 확보를 명분을 내세운다. 현실적으로는 대구경북(TK) 지역에서 '박풍'을 노리는 친박연대나 무소속 돌풍을 불출마라는 극약처방으로 잠재우겠다는 의도도 깔려있다. 한나라당 후보의 유세지원에 나서지않겠다면서도 '친박' 성향의 탈당 출마자에게는 무언의 지지를 나타낸 박 전 대표를 겨냥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이같은 금배지를 포기한 강 대표가 박 전 대표, 정몽준 최고위원을 비롯한 잠재적 대권주자들과 본격적인 경쟁에 나선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다. 지역정가에 밝은 한 소식통은 "강 대표가 총선 이후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넓지않다. 정치적 경륜으로 볼 때 국무총리 정도가 될 것이지만 이 역시 총선 결과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무총리 경험을 쌓은 후 차기 대권에 도전하는 수순을 밟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불출마 선언으로 인해 강 대표가 '공천갈등 책임론'에서 해방된 상태로 당내 입지를 굳혀갈 수 있다는 시각도 나온다. 총선 직전 번진 갈등사태에 온몸으로 맞선 강 대표가 전국을 돌며 '이명박 정부 성공'과 '경제살리기'를 내걸고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그동안 이명박 대통령, 박 전 대표에 가렸던 자신의 당내 존재가치를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박 전 대표를 정계에 입문시킨 장본인이 바로 강 대표다. 지난 1998년 재보선 당시 박 전 대표의 대구 출마를 권유했던 강 대표는 직접 선대위원장을 맡아 '정치신인' 박 전 대표를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 대표는 또 2006년 7월 당 대표 취임 이후 치열한 경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측으로부터는 '친박'이라는, 박 전 대표측으로부터는 '친이'라는 비아냥을 각각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중립을 지켜웠다. 강 대표 지역구에서는 박 전 대표 지지가 더 많이 나왔다. 

    전날 강 대표는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박 전 대표와의 정치적 인연을 정리했다. 탈당한 '친박'계 인사들과도 역시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강 대표의 '결단'을 이끌었던 박 전 대표는 대구에서 친박 인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나는 강 대표의 불출마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내 의도와는 다르다"면서 평가절하했다. 강 대표와 박 전 대표가 차기 대권을 사이에 놓고 이제 경쟁관계에 섰다는 해석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