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4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에 이 신문 김기천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미국의 ‘경제 대통령’으로 불렸던 앨런 그린스펀(Greenspan)은 회고록에서 규제 완화와 시장개방의 개혁조치로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나라로 호주를 꼽았다. 1980년대에 노동당 정부가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고, 관세를 낮추는 등 중요하지만 고통스러운 개혁에 착수한 덕분에 1991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침체도 없이 경제호황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축소판 같은 매혹적인 국가’이고 ‘미국 경제의 앞날을 예측하는 데 참고해야 할 나라’라고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작년 말 호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돈은 얼마든지 지급해도 좋으니 호주 민주주의를 당장 수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통령이 호주 정치의 어떤 측면을 두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수긍할 부분이 있다. 그린스펀이 격찬한 호주 경제모델 자체가 정치적 리더십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최근 호주 총선은 호주 정치의 이런 진면목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지난 11월 12일 항구도시 브리즈번에서 존 하워드(Howard) 총리의 총선 출정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하워드 총리는 90억 호주 달러(약 7조3600억원) 규모의 재정지출 공약을 쏟아내며 자신이 계속 호주를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야당에 뒤지고 있는 지지율을 뒤집기 위한 ‘선심(善心) 폭탄’이었다.

    이틀 뒤 역시 브리즈번에서 총선 출정식을 가진 케빈 러드(Rudd) 노동당 총재는 당초 예상과 달리 23억 호주 달러(약 1조8600억원) 규모의 공약만을 내놓았다. 그는 “우리 가족, 우리 공동체, 우리 국가의 미래를 위해 호주 정부는 지금 변해야 한다”며 “(하워드 총리식의) 무분별한 지출은 중단돼야만 한다(this sort of reckless spending must stop)”고 선언했다.

    얼마 전 호주 중앙은행이 금리를 올리며 인플레이션 압력을 경고한 상황이었기에 경제 전문가들은 러드 총재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선거에 나선 정치인이, 그것도 ‘큰 정부’ 성향의 노동당 대표가 선심 공약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부 지출을 줄이자고 한 것은 파격적인 일이었다. 호주 언론에선 ‘러드의 도박’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그 ‘도박’이 먹혀들었다. 호주 국민들이 정부 지출 억제 공약에 신뢰를 보낸 것이다. 노동당은 연립여당과의 지지율 격차를 더 벌리며 총선에서 압승했다. 한 정치인은 “러드의 (총선 출정식) 연설로 사실상 승부가 끝났다”고 했다. 연설 한 번으로 깨끗한 ‘한 방’을 터뜨린 셈이다.

    요즘 한국 대선의 최대 관심사도 ‘한 방’이다. 그러나 그 ‘한 방’의 격이 떨어진다. 주가(株價) 조작으로 투자자들에게 500억원대의 피해를 보이고, 회사 돈 384억원을 해외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는 사기꾼의 말을 놓고 ‘한 방’이니 ‘헛방’이니 하며 드잡이판을 벌여왔을 뿐이다.

    BBK에 대한 검찰 수사 발표 이후에도 별로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새삼 정책대결을 벌이기가 쑥스러울 정도로 그간의 싸움이 험악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자리를 만들고 복지도 챙기고, 서민과 중소기업을 돌보겠다는 장밋빛 공약도 쏟아지고 있지만 구체적인 실천방안은 보이지 않고 그걸 따지는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사태가 세계 경제를 흔들고 있는 것도 한국 대선에선 관심 밖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려 있는 대통령 선거를 이렇게 치러도 되는 것인지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