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7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 <‘전쟁’ 공갈에 입 다문 야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대중·노무현 두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하는 쪽이 정권을 잡으면 “전쟁 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북쪽의 김정일은 연일 “그렇다”고 엄포를 놓고 있고, 남쪽의 김대중 전 대통령도 “그렇게 되면 전쟁의 길로 갈 수도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김정일은 남한을 자신의 ‘보급투쟁’ 기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 개혁 개방을 해서 먹고살 궁리를 하지 않고, 지금 그대로인 채 남한을 봉으로 삼을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번 선거를 통해 그 봉을 놓칠세라, “정권교체되면 전쟁!”이라고 연일 협박하고 있다. 김대중씨 또한 정권이 바뀌면 그동안 자신이 한 모든 짓들의 진상이 파헤쳐지고 추궁당할까 봐 내심 여간 신경 쓰이지 않을 것이다. 이래서 그는 틈만 났다 하면 여권 단일화를 애타게 부르짖으면서 “상대가 이기면 전쟁 날 수도…” 운운하며 온갖 노추(老醜)와 초조감을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치지도외한다 해도 “누가 되면 전쟁 날 수도…”라는 말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도대체 이쪽에 김대중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이 들어서면 어떻게 해서 전쟁이 난다는 것인가? 지금 누구한테 겁주고 있는 것인가? 옛날 권위주의 정권들이 “반(反)정부 너무 하면 김일성이 남침한다”고 겁주더니, 이제는 그런 ‘반정부운동’깨나 했다는 김대중씨 등이 걸핏하면 “그렇다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공갈치고 있다.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북한 인권을 거론해도 “그러면 전쟁 난다”, 상호주의를 강조해도 “그러면 전쟁 난다”, 납북자·국군포로 석방을 거론해도 “그러면 전쟁 난다”, 핵(核) 폐기·개혁개방을 촉구해도 “그러면 전쟁 난다”고 하니 그렇다면 이쪽은 조공(朝貢)이나 바쳐 가며 전전긍긍, 단 한마디 최소한의 요구도 벙긋해선 안 된다는 것인가?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가?

    흔히 ‘평화를 위해서 그런다’고 하지만, 평화란 남이 감히 우리를 넘보지 못할 강력한 전쟁 억지력을 갖춰 놓고서 그 토대 위에서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교환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인간 세상의 이 자명한 관행을 “전쟁으로 갈 수도 있는” 것인 양 왜곡하고 있다.

    야당에도 문제는 있다. 야당다운 야당 후보들이라면 대선에 임해서는 특히 이런 망령된 궤변부터 제1의 표적으로 조준해 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김대중·노무현식 ‘햇볕’의 문제점을 조금만 지적해도 그것을 대뜸 반(反)평화, 반(反)통일, 전쟁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이 시대 최대의 미신(迷信)이자 편견, 중상(中傷), 낙인(烙印), 위선을 씻어낼 수 없다. 그런데도 보수·우파라는 이명박·이회창 진영은 자신들이 과연 김대중 말대로 전쟁을 유발하려는 사람들인지 아닌지,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다. 그만큼 ‘2007 대선’의 주전선(主戰線)이 엉뚱한 곳으로 밀려나 있다는 뜻일 것이다.

    두 이씨 진영은 누구를 주적(主敵)으로 설정하고 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이명박 지지자들의 주적은 이회창 지지자들이고, 이회창 지지자들의 주적은 이명박 지지자들인가?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과녁을 잘못 잡은 것이다. 두 진영 다 ‘태극기’ ‘자유’ ‘시장’ ‘북한 인권’을 높이 받드는 한에는 그들은 서로 주적일 수도 없고 주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주적은 “너희들이 정권 잡으면 전쟁 난다”고 공갈치는 쪽이지, 같은 ‘대한민국 진영’이 아니다.

    이명박·이회창 진영은 그래서 지금이라도 정권교체를 왜 해야 하는 것인지, 그들이 싸우려는 상대는 누구인지, 그리고 선거 판을 어디로 어떻게 끌고 갈 작정인지에 대해 묵시적으로나마 합의된 ‘행위의 규칙’ 같은 것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들은 정권교체를 말할 자격이 없다. 아직까지도 그런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사람은 역시 죽기 전에는 죽음을 모른다는 이야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