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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7 대선(大選)’은 여야 싸움이면서 또 한 측면에서는 ‘분명한 것’과 ‘분명치 않은 것’의 대결로 가고 있다. 전략적 선명성과 전략적 모호성의 대립인 셈이다. 대통합 신당이 전자의 경우라면, 한나라당 일부의 흐름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북한에 6·25 남침 사과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이라크 파병 연장은 용병(傭兵) 하자는 것이냐?” 하는 것이 범여권의 의도적인 가치 전쟁인 반면 한나라당 일각은 여전히 ‘중도(中道)’ 운운하면서 되도록이면 이념적인 도전에 휘말리지 않으려 하고 있다.
2등, 3등 하는 쪽은 어떻게 해서든 싸움을 걸어서 1등을 낙마시켜야 할 판이고, 1등 하는 쪽은 가급적 싸움을 피해야만 상처를 덜 입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한나라당으로서는 2002년에 노무현씨를 찍었다가 실망한 탈(脫)좌파와 친(親)한나라당은 아닌 유권자들을 잡아야 이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을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고, 보수이면서 동시에 보수가 아닌’그 무엇으로 흐려 놓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라면 무엇을 분명하게 하려는 쪽의 의도나 분명하지 않게 하려는 쪽의 의도나 다 그만한 이유와 고충이 있는 것으로 이해 못할 것은 없다.
그러나 대선 분위기가 달아오를수록 그리고 쟁점이 점점 더 막중한 사항으로 업그레이드될수록 백병전과 총검술을 끝까지 피하려고만 하는 방식으로는 국민의 감동을 살 수 없다. 감동은커녕 오히려 권태감을 줄 수도 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중대 사항과 관련해 항상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중도’ ‘중간’의 방패막이를 내세우는 한나라당 유화파(柔和派)보다는 차라리 “우리는 분명히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범여권의 선명성이 찬반(贊反)을 떠나 정체성과 확실성 면에서 더 진하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나라당의 박형준 같은 사람의 ‘중도’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지 그 실체를 알 수가 없다. 이런 이들에 비한다면 정동영씨의 ‘용병론’이 결코 찬성할 수는 없는 소리지만, 솔직한 것만은 사실이다.
흔히 ‘중도’라는 말을 ‘아스피린’처럼 남용하지만 NLL이 ‘영토 개념이냐 아니냐?’와 관련해 ‘중도’란 있을 수 없다. 부모가 공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해야만 했던 어느 탈북자의 비참한 이야기를 대할 때도 ‘중도’란 있을 수 없다. 그런 문제에 대해 열정(熱情) 아닌 ‘적당한 미온(微溫)’으로 넘어가는 것이 진정한 ‘중도’는 아니다. 참다운 ‘중도’는 전체주의와 수령 독재를 전면 거부했던 1948년 당시의 대한민국의 제헌정신에 투철한 데에 있다. 북한 핵을 그대로 둔 채 종전선언이니 평화협정이니 운운한 남북정상회담의 위헌성(違憲性)에 대해 “그것을 정면으로 비판했다가는 수구 꼴통 소리를 들을 것”이라며 찬성도 반대도 아니게 뒤따라갔던 한나라당 일부의 ‘아류 햇볕’에 ‘중도’의 본령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경제 위주’ ‘실용 위주’라는 말들은 물론 시비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또 ‘국가냐 시장이냐’와 같은 정책적 조율에 있어 ‘중도’의 위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예컨대 서해교전 순국 장병들의 ‘산화(散華)의 의미’ 등 구체적인 사안에 들어가서는 ‘중도’가 성립하려야 성립할 수 없는 경우 또한 한둘이 아니다. 이럼에도 이런 사안별 해당(該當) 여부를 따지지 않고 덮어놓고 ‘중도’만 내세우면 꿩도 먹고 알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중도’의 오용(誤用)이 될 것이다. ‘중도’라는 처방이야말로 적절하게 써야만 약이 될 수 있다.
1980년대 데모대 뒷줄에서 얼쩡거리다가 어찌어찌 한나라당에 몸을 두고는 있지만 그래도 ‘보수’ 소리는 듣고 싶지 않은 일부 ‘몸 따로, 마음 따로’들을 위해 ‘중도’라는 편리한 우산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대선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의 대결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