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2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에 이달곤 서울대 교수(정책학 전공)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마르크스에서 스탈린에 이르는 진성(眞性) 좌파를 추종하는 세력은 이제 없다. 공산주의 국가체제는 국민을 먹여 살리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 체제가 망해 가는 과정에서 갖가지 수정 좌파들이 등장했다. 변화된 현실에 끌려가며 교묘히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혹은 순진해서, 갖가지 논리로 탈출을 시도한 아류, 즉 신좌파(new left)가 생겨났다. 영국의 제3의 길, 독일의 신중도, 캐나다 사회주의도 이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도 신좌파가 적지 않다. 흔히 보수층에서 지난 10년간을 좌파 정권이라고 부르는데, 일관된 좌파라고는 보기 어렵지만 일종의 상황적응적 아류로 볼 수는 있다. 특히 북한을 보는 관점이나 부의 재분배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서는 좌파의 본색이 제법 드러나기도 한다.

    최근 대선 철을 맞아 각양각색의 주장과 공약이 난무한다. 그중에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공공 부문의 팽창, 의존문화의 식재(植栽), 사회적 효율에 대한 공격, 또 북한에 대한 일방적 포용 등은 자칫하다간 국가적 재앙을 넘어 민족적 재앙의 불씨가 될 수 있는 것들이다.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정부의 기본 임무다. 문제는 지원의 성격과 범위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도 높은 자존심과 나름의 능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그들이 자조정신으로 능력을 키워 삶의 지평을 확장하는 경계에서 도와야 한다. 그들이 처음부터 정부의 보조에 빠지게 되면 의존문화의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최근 일부 정치권에서는 먼저 나서서 개인의 자조 의지를 접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아무런 능력의 신장 기회도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사회적 일자리나 공적 부문의 나태해진 모습을 보면 정부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지키고자 하는 품위의 경계를 넘어서는 각종 행태를 자랑삼고 있다.

    갖가지 종류의 노조를 꾸려서 과도한 이익을 얻으려는 세력에서부터 정부의 보조에 매달리는 수많은 단체와 협회, 지역과 직능 이기주의로 떼쓰는 이익집단, 생계를 정부에 맡기는 의존집단, 편하게 일하고 더 많이 받으려는 사람들은 ‘세금 먹는 사람(tax eater)’이다. 문제는 이 부류에 한번 빠져들면 자신을 가꾸고 잠재력을 키우기는커녕 나락의 과정에 몸을 내맡긴다는 점이다. 이들은 결국은 세력을 규합해 정부에 더 많은 요구를 하고 개혁을 가로막는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기업을 공격하고, 새로운 공익사업을 극단적인 수법으로 방해한다. 이들이 ‘신 신좌파(new new left)’다. 이러한 집단은 이미 아르헨티나를 파탄으로 몰고 간 적이 있고, 최근에는 몇몇 서구 국가에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선거 과정에서 이들 ‘신 신좌파’가 눈덩이처럼 커질 우려가 있다. 세금 내는 사람(tax payer)에게서 더 많은 세금을 받아내 그것을 세금 먹는 사람에게 주면 모든 사람이 보편적 중산층으로 탄생할 수 있다고 부끄럼 없이 주창하는 정치인들이 늘고 있다.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단숨에 처방하는 정치꾼들이 더 활개를 치니 ‘신 신좌파’의 확대는 뻔한 일이다. 민주국가의 정치인들이 이들을 현혹하는 과정에서 민주자본주의는 망할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나은 대안이라고 단언한 좌파 이론가도 있지 않았는가.

    의존문화가 번창한 곳 중 하나가 북한이다. 두어 번 가본 것에 불과하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이 근로의욕을 심각한 수준까지 잃고 있었다. 자조의 노력을 진작시키지 않는 시스템이 존재하는 한 남한의 간헐적 지원은 의존문화를 심화시킬 뿐이다. 이민족의 피를 빨아 먹지 않고 오직 우리의 노력으로 자수성가한 ‘위대한 한국’의 경험에서, 우리는 의존시스템의 확장은 곧 재앙이라는 진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