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1980·90년대 이야기인가? 이제 옛 여권은 철저히 변해야 한다.” 이것은 이른바 ‘수구 꼴통’이 한 말이 아니라 그 ‘수구 꼴통’을 비난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했던 손학규씨가 한 말이다. 손씨가 지칭하는 옛 여권은 ‘수구 꼴통’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과 옛 열린우리당, 즉 과거 운동권을 의미한다. 이쯤 되면 자칭 ‘민주화 세력’ ‘진보 세력’ ‘민주 민족 민중 세력’ 운운 하던 사람들의 시대를 극복하고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 의식은 범(汎)여권에도 있는 셈이다.

    건국과 산업화의 시대는 많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1987년을 고비로 민주화시대에 의해 지양(止揚)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민주화시대 역시 많은 진전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시대에 의해 지양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산업화에 그 나름의 ‘그늘’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역시 그 나름의 ‘그늘’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시대의 ‘그늘’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포퓰리즘과 폭민(暴民)정치로 타락한 일탈 민주주의, 탈레반적 배외(排外)사상으로 전락한 일탈 민족주의, 우파 주도에서 좌파 주도로 바뀌었을 뿐인 여전한 국가 관료 통제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절망적인 것은 과거 권위주의 세력이 그랬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소위 민주화 세력이라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의 과오와 오류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그 ‘열성 당원’들은 물론 그들과 결별했다는 다른 여권 사람들도 간혹 정치적 제스처로서 ‘악어의 눈물’을 흘리기는 했어도 자신들의 일탈 민주주의, 일탈 민족주의, 권력형 스캔들에 따른 도덕성 상실에 대해 진정으로 속죄하며 자기 비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기에 민주화 운동권, 좌파 운동권의 고질적인 아집 독선 위선 구태 무지가 있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의 ‘그늘’을 극복한 것이 민주화였다면 일탈 민주주의의 ‘그늘’을 극복할 길은 폭민주의를 제압할 법치주의, 폐쇄적 민족주의를 걷어치울 지구화, 그리고 국가 통제를 뛰어넘을 자유화, 자율화의 확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선진적 진화(進化)는 1948년의 대한민국 제헌 정신을 끝까지 수호하는 데서만 가능한 일이다. 한반도에서 법치, 국제화, 자유화를 보장할 질서는 오직 대한민국 헌법에만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북 정상회담에서 북핵 폐기문제를 덮고 이른바 ‘평화협정’을 거론하는 등 ‘1948년 제헌정신’을 어떤 방식으로든 일그러뜨리려는 기도가 작동하는 한에는 이 시대의 선진화 지향은 계속 시련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7 대선’의 기본 주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2007’의 쟁점은 법치, 개방, 자유화라는 공통의 목표를 어느 당 후보가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 것이냐의 경쟁이어야 하지, 그 목표 자체에 대한 긍정이냐 부정이냐의 싸움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2007’은 그런 당위적 차원을 떠나 ‘1948년 정신’의 수호냐 훼손이냐의 극단적인 한판 승부로 갈 것임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노무현 김대중 김정일의 ‘반(反)보수 진보 대연합’ 또는 ‘일탈 민족주의 연합’은 ‘사생결단’한 듯 ‘48년 정신’의 훼손 쪽으로 내닫고 있고, 여권 근본주의자들뿐 아니라 일부 야당 기회주의자들까지 그런 가락에 장단 맞추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명박 후보가 진정으로 시대의 선도자가 되려면 그는 이 일탈적인 흐름에 감연히 맞서야 한다. 그리고 같은 논리로 범여권의 후보도 진정으로 남다른 차별성을 드러내려면 한나라당에 앞서 ‘80·90년대의 잔재’부터 더 적극적으로 극복하고 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여건, 야건 그들 후보들에게 과연 포퓰리즘에 편승하지 않을 의지와 사명감이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