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가 한국의 순혈주의에 경종을 올리는 권고안을 발표했다. 한국사회가 단일민족의 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 문제를 인식하는데 있어 국수주의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단일민족이라는 자긍심에서 기인하는 인종적 편견과 폐쇄성이 국내에 체류중인 외국인과 이들 후손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지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한국사회가 혈통의 순수성과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단일민족이라는 정서적 일치감이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사회를 지탱하는 용광로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민족주의에 근간한 감정이입과 수사학을 통해 한국의 정치세력은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었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세계10위권의 경제강국 건설과 민주주의 정착 과정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가 우려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민족주의로 위장된 인종적 폐쇄성의 근본 원인이 국내의 정치적 동학과 필요성에 의해 동원여부가 결정되는 민족주의의 종속적 성격에서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개념과 실체가 불분명한 민족이라는 허상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이 굳건하게 자리잡을 수 있었던 원인은 상호 경쟁하는 정치체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대중동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남과 북의 정치세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과 북의 지배적 패러다임인 민족주의가 지니는 허구성은 중국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를 바라보는 이율배반적인 시각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최근 들어 연변 조선족 마을의 해체에 관한 우려가 한국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한중 수교 이후 연변의 조선족은 보다 나은 삶의 기회를 찾기 위해 한국자본이 집중적으로 투자되고 있는 동남부 연안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떠난 연변의 빈 자리는 한족 및 기타 소수민족에 의해 채워지고 있다. 결국 한중 수교가 오랜 기간 독특한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온 조선족 마을의 붕괴를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한중 수교 이전 조선족이 한민족 공동체를 유지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이 연변이라는 변방도시가 지니고 있는 낙후성과 고립성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제개발과 함께 중국 국적의 조선족이 경제적으로 보다 윤택한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경제행위이다. 이를 두고 한국언론이 "제3의 한국사회"인 연변이 붕괴되고 있다고 과장하는 것은 조선족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제공할 수 있는 실질적 도움을 모색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민족이라는 정서를 오용해 조선족 삶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와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무책임한 행위에 불과하다.

    "우리끼리"를 강조하는 북한 또한 조선족 문제에 접근하는데 있어 정치적 논리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조선족은 한국전쟁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전쟁 이후 적지 않은 조선족이 북한 사회에 체류하였다. 당시 북한은 노동력 부족과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조선족 유입을 적극 환영했다. 하지만 북한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어느 정도 회복되던 시기 중국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문화혁명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가 바닥을 치던 시절 오지에 거주하던 연변의 조선족은 생존을 위해 북한으로의 잠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은 같은 민족이라는 대의적 차원에서 조선족을 수용하지 않고 개개인의 교육수준과 기술습득 정도에 따라 조선족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나머지 조선족을 중국으로 귀환시켰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첨예한 대립이 있던 당시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진 조선족들이 정치적으로 극심한 탄압을 받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족 사례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반도에서 강조되는 민족주의와 단일민족의 자긍심은 사실상 정치적 동원의 필요에 의해 조작된 허상에 불과하다. 그나마 한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유포된 민족주의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공헌하는 순기능을 수행했던 것과 달리 북한의 "우리민족 제일주의"는 스스로를 고립과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역기능만을 수행했다.

    오늘 날 급속히 변화하는 국제환경은 단일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우수성을 자랑하는 한민족으로 하여금 글로벌 경쟁의 압력에서 살아남기 위한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혈통의 순수성을 따지면서 글로벌 사회의 변화를 거부하는 시대의 낙오자로 존재할 것인지 적극적인 자세로 변화하는 세계질서의 흐름을 주도할 것인지는 오랜 기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민족주의의 허상과 외피를 탈피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객원칼럼니스트의 칼럼 내용은 뉴데일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