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혹 군 시절 생각을 떠올릴 때면 그 때 그 ‘충격’은 벌써 20년도 훨씬 넘은 세월의 망각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다시 살아나온다. 현실의 인식에서 비롯된 그 ‘충격’은 신선하지도 않은, 자존심을 긁어대는 불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동계훈련을 겸한 미군과의 합동훈련 때였다. 우리가 매년 했던 동계훈련은 말 그대로 추위에 적응하며 극한(極寒)의 난지(難地)에서 전투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 눈밭에서 뒹굴기는 예사였고 얼음물을 깨고 들어가 물개 흉내를 내는 것도 필수였다. 야지에서 잠을 잘 때는 몸속을 파고드는 한기와 습기가 최대의 난관이었다. 치우지 못할 정도로 눈이 쌓였을 때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등산가들에게는 고도로 과학적인 최고급 장비가 그런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막아주겠지만, 우리에게는 생존을 위한 훈련이라는 명목이 최대의 장비였을 뿐이었다. '충격‘에 얽힌 사건은 뒤로 하고 우선 그 전의 이야기를 먼저 떠올려 보고자 한다.

    그날도 밤새 산악행군을 하고 어스름 새벽녘에 취침을 위해 은거지를 찾아들어가고 있었다. 한겨울의 산속에서 마른가지에 부딪치는 바람소리는 추위로 얼어붙어 있는 피부에 오싹하는 소름을 더욱 돋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그것에 푸른 달빛마저 앞길을 비춘다면 추위가 엄습하는 그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게 된다.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원도 최전방 고지의 날씨니 붉게 피어오른 새색시 볼에 가쁜 숨을 고르며 입을 맞추는 상상을 하지 않고서는 온전하게 밤을 지새우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숲을 헤집고 들어가 마른 솔잎이 적당하게 쌓여 있는 경사진 한 곳을 골라 지붕 삼을 텐트를 치기 위해 평탄작업을 실시했다. 얼어붙어 있는 땅에 야전삽은 장난감에 불과했었다. 차라리 솜털을 골라 살살 땅을 달래주는 것이 더 낳았을 것이다. 몸이 천근만근인데 그것으로 남은 밤을 지새울 수는 없었다. 참지 못할 배고픔이 맛있는 반찬이 되는 것처럼 밀려드는 피곤함이 따뜻한 내 집 안방으로 모두를 인도해줄 것으로 믿고 대충 누울 자리만을 확보했었다. 고참들이 각조의 텐트를 치는 사이 후배들이 라면을 끓여왔다.

    “이 산속에 흐르는 물이 있든?”
    “아니요. 계곡이 저 아랜데 그런 물이 있을 리가 있어요?”

    내 조수는 무언가를 물으면 항상 이렇게 시비조의 말투로 대답하곤 했다. 그만큼 서로가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이 물 어디서 났어?”
    “저기 아래 찾아보니까 얼어붙어 있는 물이 있어서 그 얼음 깨 녹였어요.”
    “웅덩이 물이지?”
    “네.”
    “깨끗해? 확인했어?”
    “아니 괜찮아요. 끓였잖아요? 지금 이 판국에 그런 거 가리게 됐어요?”

    맞는 말이었다. 후배한테 충고를 듣고서야 현실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던 것이다. 어쨌든 뜨뜻하게 뱃속을 녹여냈을 것이다. 남아 있던 물이 숭늉인양 후후 불어 마시며 갈증까지 달랬었다. 그리고는 그냥 그렇게 잠들어갔다.

    적이 습격해 온 줄 알았었다. 산속을 메아리치는 소리가 바깥에서 시끌벅적했다. 침낭을 방패삼아 더욱 몸을 웅크렸다.

    ‘나는 건들지 마! 일어나기 싫단 말이야!’

    피곤을 견디기도 힘들었지만 침낭을 나서면서부터 벌벌 떨게 될 현실이 더욱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수록 바깥 상황이 심각해져가는 것 같았다.

    “대장이 누구야? 나와 보라고 그래!”
    “다들 취침 중이니 조용히 좀 하세요.”
    “뭐? 내가 조용하게 됐어? 소여물로 쓸려고 말려 놓은 짚인데 그걸 다 가져오면 어떡하란 말이야!”
    “이따가 일어나면 그대로 다 갖다 놓도록 할게요. 걱정 마시고 내려가 계세요...”

    ‘뭔 소리야? 짚? 여물? 저 사람은 누구지? 어떤 놈이 소여물을 먹으려고 갖고 왔단 말이야? ...’

    그냥 그렇게 또 잠들어갔었다. 얼마간의 취침 후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다. 얼굴을 덮었던 야전상의를 걷어내자 금방 콧구멍이 얼얼해져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코털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듯 했다. ‘뭔가 꿈을 꾼 것도 같은데...’

    기억을 더듬자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상황이 궁금해져 자초지종을 확인했다.

    약삭빠른 어떤 놈이 은거지를 찾아 산을 오를 때, 잠잘 때를 생각해 깔개로 사용하려고 밑의 논에 쌓여 있던 마른 짚을 둘러메고 왔던 것이었다. 당시 훈련 시에는 주특기별로 텐트를 사용했으니 보통 2인 1조가 되어 하나의 텐트를 차지했었다. 아마도 훈련 경험이 많은 사수가 조수에게 사주했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몇몇이 그 현명함에 감탄해 따라하자 논에 쌓여 있던 짚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른 아침에 논에 나왔던 농부가 그것을 알고 놀랐던 것은 당연했다. 인적이라곤 찾기 힘든 강원도 깊은 산골짜기에서 그런 일이 있어났으니 말이다.

    재산의 일부가 사라진 그 농부는 황급히 흔적을 찾아 산을 올라왔던 것이었다. 어둠 속에 짚을 짊어지고 오다가 한가락 두가락 흘려 놓은 것을 추적해 왔던 것이었다. 그 힘든 상황에서도 포근한 잠자리를 계획하며 게릴라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 전우들의 행동도 그랬지만, 그런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끝내 찾아온 농부의 용기 또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강원도의 외진 곳을 다니다보면 척박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자신들 가족들을 제외하곤 사람 구경을 쉽게 하지 못해 한 달 이상을 잘 씻지도 수염을 깎지도 않은 우리들을 반가운 사람으로 맞이해주곤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곳이었으니 그 농부의 행동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민간인에게 피해를 준 불량 게릴라들은 그날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짚을 고스란히 모아 산을 내려가야만 했었다. 그 사이 우리들은 모닥불 앞에 앉아 숟가락으로 반합을 휘젓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훈련양심은 지키고 볼 일이었다.

    세수는 못해도 이는 닦아야만 했다. 이를 닦지 않으면 산을 오를 때 숨이 더욱 갑갑하게 목을 조여오기 때문이었다. 식수를 공급해오던 조수에게 물었다.

    “너 물 어디서 구해 왔다고 그랬지?”
    “저 밑이요. 얼음 깨서 녹여야 되요. 사수님, 뭐 하려고요?”
    “이 닦게...”
    “그 옆에 아궁이도 봐놨어요...”

    조수가 알려준 곳을 찾아 내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얼음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계곡의 상류쯤 어느 곳에서 작게 샘솟던 물이 얼어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곳저곳을 살펴 보다 그리 크지 않은 한 웅덩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엔 고여 있는 물이 그대로 얼어 있었고 한쪽에 얼음을 뜯어낸 흔적이 눈에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아래를 살펴보니 검은 침전물들이 가득 밑에 가라앉아 있었다.

    ‘으잉? 이놈이 이 물을?’

    ‘이미 먹었잖아? 뭐 어때...’

    산을 오르다보니 마음이 넓어졌던 까닭일까? 조수의 행동을 탓하는 마음보다 힘들고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트려 녹여냈던 수고가 떠올랐었다. 조수가 했던 대로 얼음을 녹였다. 텐트로 돌아와 시치미를 떼고 물었었다.

    “너 혹시 저 웅덩이 얼음으로 밥했던 것은 아니지?”
    “뭐 어때요? 끓였는데...”
    “그럼 다른 팀 애들은 어디서 물을 구해 온 거야?”
    “몰라요... 다 마찬가지지. 이 날씨에 이런 데서...”

    명색이 사수가 조수한테 또 훈계를 듣는 격이었다. 지금은 대구에서 아이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제대했을 때 내 막내 처제를 맺어주려고 많이 노력했었는데... 둘은 인연이 아니었나보다. 그것까지 강제로 어찌할 수 없었다.

    겨울이라 산골의 해는 아주 일찍 떨어졌다. 행군 출발 전 반드시 했어야 할 것은 군화에 구두약을 묻혀 닦는 것과 추위를 막기 위해 입고 있던 내복을 벗어내는 것이었다. 소금기에 절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군화 때문이었고, 그 추위에도 행군 중에는 땀이 비오는 듯 쏟아지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짐을 챙겨 다시 출발을 서두르는데 조수가 내 반합을 가져가더니 무언가를 담아 왔다.

    “이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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