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9일자 오피니언란에 실린 이 신문 논설위원인 배명복씨의 <부시와 김정일 빅딜하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세상 일에는 확실히 때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원해도 시운(時運)이 안 맞으면 이룰 수 없는 일이 있음을 살면서 새삼 깨닫게 된다. 한 떨기 국화 꽃을 피우려면 소쩍새도 울어야 하고, 천둥과 번개도 쳐야 한다. 인시(人時)와 천시(天時)의 조화일 수도 있고,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의 조화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운명론자가 되는 모양이다.

    어쭙잖게 운명론을 들먹이는 것은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는 6자회담 때문이다. 협상 테이블 위에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는 북·미 간 이해의 충돌은 인간의 지모(智謀)와 계책(計策)으로 말끔한 수습이 어렵다. 신뢰 없이 진정한 합의는 불가능한 법이지만 베이징 협상장은 신뢰의 회색 지대다. 북한은 아직 미국을 믿지 못하고, 미국도 북한을 믿지 못한다. 불신에 기초한 인간의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운을 말하는 것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폭풍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 워싱턴에 불고 있는 ‘이라크 철군’ 바람은 나비의 날갯짓 정도가 아니다. 국회의사당에서 백악관 쪽으로 불고 있는 이 바람이 불원간 폭풍으로 변해 한반도를 강타할 것 같은 운명론적 예감에 솔직히 기대가 반, 우려가 반이다.

    이라크의 모래 수렁에 빠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다. 부시의 요구대로 올 들어 3만 명 가까운 병력을 증파했지만 사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다. 미군 사망자 수는 3600명을 넘어섰고, 2만6500명이 부상했다. 지금까지 쏟아 부은 돈만 4500억 달러다. 미국 국민 10명 중 7명이 철군을 요구하고 있다. 주류 언론도 완전히 철군으로 돌아섰다. 공화당 중진 상원의원들까지 가세하면서 의회는 급속히 철군 쪽으로 균형추가 기울고 있다.

    정치인은 표를 생각하고, 정책은 득표의 유불리에 따라 결정되기 마련이다. 대외정책도 예외가 아니다. 내년 말 선거를 앞둔 공화당 의원들로서는 이라크 정책의 선회가 불가피하다. 상대가 있는 대외정책이라 하더라도 일단 바꾸기로 마음먹으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무섭게 바꾸는 나라가 미국임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이라크 철군은 부시와 공화당의 이라크 정책 대실패를 의미한다. 이를 만회할 만한 외교적 치적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지나간 버스 다시 붙잡는 격으로 부시는 그제 중동평화 국제회의 개최를 제안했다. 중동·유럽과 함께 동아시아는 미국이 두는 체스판의 3대 요목(要目)이다. 북핵 문제가 타결돼 한반도 평화와 나아가 동아시아 질서의 안정을 이룰 수 있다면 이라크의 실패를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이라크 철군 바람과 때를 같이해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전쟁 종전 선언설이 증폭되고 있는 것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2·13 합의가 이행 단계에 들어서면서 한국전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논의가 미 행정부 내에서 본격화하고 있다. 6자회담의 틀을 동아시아 안보협력기구로 전환하는 구상도 구체화하고 있다.

    자연수명의 한계와 후계체제의 불안에 직면한 김정일과 시간에 쫓기고 업적이 아쉬운 부시의 성급한 빅딜 가능성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의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북핵 문제가 되돌릴 수 없는 수준으로 완전하게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핵시설 불능화라는 중간 수준에서 미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핵이라는 암 덩어리를 안고 있는 우리로서는 가장 두려운 시나리오다. 기존 핵물질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보장 하에 미국과 북한이 불온한 키스를 하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북한은 지난주 남한을 배제한 북·미 간 군사회담을 제안했다. 예상을 깨고 미국은 긍정적 반응으로 화답했다. 6자회담의 북·미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과 김계관이 주고받는 대화를 우리가 100% 다 안다는 보장은 없다. 재깍거리는 운명의 시계 바늘과 함께 기대와 불안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