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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백화종 편집인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법에서는 유죄의 혐의가 있더라도 증거가 없으면 판사가 무죄선고를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에서는 증거가 없더라도 혐의나 의혹만으로 유권자들은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다” 꼭 10년 전, 그러니까 1997년 8월 4일 기자가 이 난에서 ‘법과 정치 사이’라는 제목으로 쓴 칼럼의 한 대목이다. 신한국당 대선 후보 이회창 씨가 두 아들의 병역 의혹에 대해 판사 출신답게 “법적으로 비리의 증거가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며 “정치공작, 중상모략”이라고 항변하던 데 대한 소견이었다.
그 때의 대선 정국과 비슷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 다만 그 때는 유력 후보의 아들들 병역에 관한 여야의 공방이었던 데 반해 지금은 유력 예비 후보의 재산에 관한 한나라당 내 공방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쪽에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본인과 친인척 명의 부동산 등 재산 관련 의혹들을 부각시키며 비리를 시인하라고 압박하고 있으며, 이 전 시장 쪽에선 증거도 없는 네거티브 공세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이 전 시장 쪽은 또 문제의 자료들이 일반인은 입수하기 힘든 것들로, 보이지 않는 손(정부 기관)과 일부 언론 그리고 박씨 쪽이 합세하여 벌이는 정치공작의 냄새가 짙다고 역공한다.
의혹들의 사실여부를 기자로선 알 길이 없다. 박 전 대표 쪽에서도 언론 등이 제기한 의혹들을 인용하며 해명하라고 다그칠 뿐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진 않기 때문이다.
의혹들로 공격을 당하는 쪽에서는 그것들이 사실이 아닐 경우 버선목이니 뒤집어 보일 수도 없고 답답한 노릇일 터이다. 그렇다고 이 전 시장 쪽에서 무대응 내지 정치공작으로 일축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은 아닌 것 같다. 정치에서 유권자는 ‘국민정서법’이라는 초헌법적 존재를 가지고 물증이 없더라도 의혹이나 심증만 있으면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권자들은 이 법을 가지고, 유죄의 물증이 있어도 당사자의 태도와 사안에 따라선 정상을 참작하여 무죄선고를 하기도 한다. 자녀 학교 때문에 위장 전입한 적이 있었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듯 잘못이 있었다면 시인 사과하고, 사실이 아니면 역정을 내기보다 최대한의 성의를 가지고 박 전 대표 쪽에서 요구하는 방식대로 해명하도록 노력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박 전 대표 쪽이 아니라) 심판자인 국민의 마음을 얻으라는 얘기다.
자료 유출과 관련한 정치공작이라는 부분도 그렇다. 물론 정부 기관의 개입이 사실이라면 이는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냥 넘길 문제가 아니다. 법적으로는 독수독과(毒樹毒果)이론, 즉 독 있는 나무에 열린 과일엔 독이 있으므로 먹지 말아야하듯 불법으로 수집된 증거는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의 공방이 법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판사격인 국민은 이 전 시장 쪽으로선 유감스럽겠으나 자료의 수집 절차보다 의혹의 실체, 즉 그 사실여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부분에 대해서도 당에 맡기는 방법 등을 통해 철저히 규명하되, 그것을 의혹의 진실 해명보다 우선순위에 두는 건 효과적이지 않을 듯싶다.
마침 당의 국민검증위가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청문회를 통해 검증하고 검찰에서도 의혹 공방과 관련하여 들어온 고소들을 수사하면서 의혹의 진위까지 규명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의혹들이 명명백백하게 가려졌으면 좋겠으나 공방만 가열시킬 뿐 진실 규명은 쉽지 않은 일일 듯싶다. 또 앞으로도 더 크고 더 많은 의혹들이 제기될 것이다. 이 전 시장 쪽은, 아니 모든 후보들은 이후 더 치열하게 전개될 의혹 공방이 법의 영역이 아닌 정치의 영역에서 벌어진다는 사실, 그래서 헌법 위에 자리하고 있는 국민정서법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게 현명할 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