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광화문에서'에 허엽 문화부 차장이 쓴 '좌파의 자기 기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우리나라는 도성과 시골의 문화(文華) 수준 차이가 심해 도성에서 몇십 리만 벗어나도 태고의 원시 사회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멀고 먼 외딴 곳으로 숨어드는 것은 결국 자손을 노루나 토끼처럼 만들어 버리는 길이다.”(다산선생 지식경영법·정민 지음) 

    다산 정약용(1762∼1836)이 ‘가계(家誡)’에서 두 아들에게 당부했던 말이다. 그는 “벼슬길이 끊어지면 서울 언저리에 의탁해 살면서 문화의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고도 했다. 다산이 ‘文華’라고 했던 것을 보면 글만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그는 “경제를 생각하되, 운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다산의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 어른들이 아이한테 자주 하는 말이 “공부 열심히 해라(좋은 대학 가라)”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돈 많이 벌어라”다. ‘명문대’ ‘1등’ ‘부자’는 다산의 가르침대로 ‘운치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의 ‘오래된 생활 가치’이자 발전의 동력인 셈이다.

    이 오래된 가치를 추구하는 데 좌우가 다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좌파는 이를 이율배반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집권 이후 단맛을 즐기면서도 밖으로는 ‘서울대 탓’ ‘강남 탓’을 외치는 것이다. 특히 자식한테 ‘아름다운 꼴찌’를 권할 용기가 없으면서도 꼴찌가 아름답다며 명문대를 비방하는 교육학자나 관료, 자식들한테 “강남에 살아선 안 된다”고 할 뜻이 없으면서도 “강남을 떠나라”고 하는 경제학자나 관료가 그들이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말을 빌리면 이들은 ‘강남좌파’로 불린다. 이들은 개인적 만족과 사회적 아픔을 분리한 채 산다. ‘가진 자의 사회적 의무’를 모르는 기득권 우파와 다를 바 없다. 고위직 물망에 올랐다가 집안에 돈이 많고 친일 경력자가 있다는 이유로 빠진 원로 좌파 교수나 귀족 노조로 불리는 대기업 노조가 이런 사례로 꼽힐 만하다. 청와대에서 일했던 한 공무원은 “(청와대에) 들어가 보니 운동권도 여러 종류더라”며 혀를 찼다. 강 교수는 이에 대해 “배부른 진보가 배고픈 척할 필요는 없으나 공적 영역을 향해서만 진보를 외칠 게 아니라 사적 영역과 행태도 진보적 가치의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부자 되세요’ ‘1등 해라’는 속세를 떠난 구도자가 아니라면 뿌리치기 어려운 가치다. 종합부동산세를 당연시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집값을 궁금해하는 게 보통 사람의 마음이고, TV 드라마에서 화려한 주인공을 보통 사람들이 즐겨 본다는 통계도 있다.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북한에서 김일성대가 엘리트 코스라는 점은 무엇을 말하는가.

    물론 한국 자본주의의 문제가 심각해질수록 좌파적 가치도 존중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의 일탈이 초래하는 욕망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타인과의 공존, 분배와 나눔 등이 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좌파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오래된 생활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아무리 외쳐 봐야 ‘명문대’ ‘부자’ ‘1등’에 대한 가치는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근 한국 사회가 보수화하고 있다는 여론도 보통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정한다는 표시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가치 앞에 겸손해져야 한다. 생각대로 살지 못하면,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자기기만에서 벗어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