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9일자 오피니언면 '포럼'에 제성호 중앙대 법학과 교수가 쓴 '과거사위, 법치의 원리 일탈하고 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14일 9154건의 진실규명 신청사건에 대해 조사 개시를 결정했다. 여기에는 2006년 4월25일 첫 조사 개시 결정후 현재 조사가 완료됐거나 진행중인 388건과 직권조사 사건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지난 11개월간 400여건을 조사했으니, 이런 추세로 갈 경우 9000여건을 모두 다 조사하는 데 20년 이상이 걸린다.

    하지만 과거사위의 활동기간은 첫 조사 개시 결정일로부터 4년간이다. 과거사위가 임기 내에 이들 사건의 ‘진실’을 모두 규명하려면 앞으로 하루 평균 8건 이상을 매일 처리해야 한다. 졸속처리가 아니라면 몰라도 정상적으론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벌써 인력 타령, 예산 타령이다. 송기인 위원장은 최근 “예산과 인력 부족 등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관계 부처와 협의중이며 기본법 개정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거사위는 이미 190여명을 고용해 연간 120억원의 혈세를 쓰고 있다. 매년 인건비나 관리비 등 경상비 자연증가분도 적지 않을 터인데, 과거사 헤집기에 인원 추가, 예산 확대는 국민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

    활동 시한 내에 소기의 성과를 내야 하는 게 위원회의 임무다. 지금은 시간·인력·예산 부족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인력이 모자라면 가용인원을 적절하게 조정해 해결할 일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힘을 빌려 임기 연장을 시도할 경우 독립성이 훼손될 게 분명하다. 과거사 규명에도 코드를 맞춘다는 세간의 비판과 우려를 시인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사실 9000여건의 과거사 조사는 과욕이자 무리가 아닌가 싶다. 조사 결정 대상 9154건 중 7533건은 6·25를 전후한 시기의 국군과 경찰, 우익단체나 미군에 의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라 한다. 이미 50년 지난 사건들의 경우 반대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나 증인을 확보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이런 상황에서 제한적인 정황증거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측의 일방적 진술에 의존해 역사와 진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만일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청산돼야 할 과거사를 또 하나 만드는 격이 될 것이다.

    특히 역사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에 의해 학문적 검증이 끝난 것들을 재조사하는 것은 시간과 예산 낭비일 뿐이다. 여순반란 사건이나 국민방위군 사건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기에 대표적인 사건만 조사해 진실을 규명하고, 나머지는 포괄적으로 접근, 성격을 규정하는 데 그치고 학계의 역사적 판단과 정리에 맡기는 것이 옳다.

    좌익공안사건의 진실 규명에는 각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공안사건은 거의 다 실체가 있는 것들로, 3심절차를 거쳐 확정된 것들이다.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일부 무리한 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재심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법부의 판결을 사실상 무효화시키는 행위를 해선 안 된다. 이는 법치(法治)국가의 원리, 특히 권력분립의 원칙과 대법원 판결의 확정력을 부정하는 불법과 다를 바 없다.

    과거사위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입증하려고 모든 신청사건을 다루겠다고 고집할 것으로 보인다. 또 막대한 혈세 사용에 대한 비판에 맞서기 위해 실적 내기에 집착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심사 미비, 졸속 처리 등 무리를 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사위 구성의 이념적 편향성도 객관적인 진실 규명에 의문을 품게 하는 요인이다.

    과거사위는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민족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민통합에 기여”(과거사법 제1조)하는 방향에서 조사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자유민주주의 건국이념 존중이란 기본원칙과 궤도를 일탈하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물줄기를 교묘하게 뒤집는 반국가적·반역사적 행위가 진실 규명이란 미명 아래 자행돼선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