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0일자 칼럼 <‘대통령의 비전’, ‘국민의 비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최근 인천항만공사가 비전 선포식을 갖고 2020년까지 ‘황해권 최고의 교류중심 거점으로 성장’한다는 장기 구상을 발표했다. 매출액 3350억원, 컨테이너 물동량 534만개라는 목표도 정했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고객에게 신뢰받는 글로벌 가스 안전 서비스 기업’을, 부산은행은 ‘동남경제권 일등 은행’을 내거는 등 올 들어 기업들의 비전 선포식이 여러 차례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일부 대기업에서 불기 시작한 비전 경영의 바람이 이제는 공기업과 중소기업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경영 환경이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할수록 기업들은 비전을 찾는다.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해 임직원들이 꿈과 희망을 갖고 더 열심히 뛰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업 성공을 위한 첫걸음은 적절한 비전을 세우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국민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국가 비전은 미래의 국가 번영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 주요 국가들은 너나 없이 10~20년 앞을 내다보는 비전 수립에 공(功)을 들이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정부가 올 들어 ‘비전 2030’과 관련된 ‘국민 건강 투자전략’ ‘인적자원 활용 2+5 전략’ ‘2단계 국가 균형 발전대책’ ‘2030 산업 비전’ 등 중장기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것 자체를 탓하기는 어렵다. 임기 1년 남은 정권이 왜 10년, 20년 뒤 그림을 그리느냐고 비판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임기 5년이라고 해서) 5년짜리 정책만 해야 하느냐”는 노무현 대통령의 항변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정부가 ‘비전 2030’대로만 하면 한국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처럼 과대 포장하고, 다음 정권이 할 일까지 미리 정해 주겠다고 나서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오늘의 지식이 내일의 쓰레기’가 되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변화의 속도가 그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더욱이 ‘비전 2030’에는 큰 정부·분배·균형 발전으로 기울어 있는 이 정권의 경제철학이 너무 짙게 배어 있다. 세계의 흐름과 거꾸로다. 그런데도 정부가 “헌법보다 고치기 어려운 정책을 만들겠다”며 대못 박고 말뚝 박으려 한다면 그건 재앙을 부르는 일이다. 아직까지 정부의 중장기 대책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부족하고 재원 조달 방안도 분명치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이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낮은 것도 ‘비전 2030’이 안고 있는 문제다. 비전을 실천하는 데 필요한 국민적 공감대가 만들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더욱이 노 대통령은 레이건과 같은 ‘위대한 소통자(communicator)’도 아니다. 대통령이 ‘비전 2030’을 전파하겠다고 나설 때 극소수 팬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들은 고개를 돌리는 것이 현실이다. ‘비전 2030’은 아직 ‘대통령의 비전’일 뿐 ‘국민의 비전’은 아니다. 그래서 이 정권과 수명을 같이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깝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치우쳐 있기는 하지만 ‘비전 2030’의 방대한 내용엔 취할 부분도 있다. 앞으로 20여년을 내다보면서 국가 경영의 큰 그림을 그려본 것도 귀중한 경험이고 자산이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계속 활용·보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 거기엔 전제가 필요하다. 미래를 보는 눈에 배어 있는 이 정권의 체취를 일단 지워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