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 '에디터칼럼'란에 이 신문 이하경 문화·스포츠부문 에디터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1970년대 후반에 대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억울한 세대'로 생각한다. 국민의 기본권을 꽁꽁 묶어 놓은 유신독재에 대한 울분이 끓어올라도 속 시원하게 데모 한 번 못했다. 아니, 데모는커녕 유인물만 몇 장 뿌려도 바로 붙잡혀 가 몇 년씩이나 징역을 살아야 했다. 감시와 연행, 고문과 투옥으로 세상에 대한 의견을 떳떳하게 말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데모의 '예비동작'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숨막힌 시절이었다.

    어찌 보면 더 기가 막힌 것이 '일반학생'들이었다. 별것도 아닌 일로 학교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친구들을 공포와 무력감 속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선택은 간단했다. 암울한 현실을 애써 외면하거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학교 앞 당구장과 술집이 미어터지고, 교정에서 아무렇게나 앉아 포커를 치는 군상(群像)은 당시의 낯익은 풍경이었다. 어차피 고민과는 담을 쌓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겐 이런 식의 도피가 불가피했을 것이다.

    사회의식이 지체된 미성숙의 상태로 성년의 문턱을 넘어섰던 후유증은 평생 따라다녔다. 이들에게 선배세대의 당당함과 후배세대의 자신감은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들만의 시대를 가질 수 없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완화되기는 했지만 이들의 상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강요된 침묵과 체념의 기억 때문에 중요한 순간마다 주저하는 기질을 지금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특정 세대 집단을 넘어선 국가적 차원의 불행이고 손실이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70년대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재판한 법관의 명단을 공개한 것을 놓고 '인민재판'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억울한 세대'가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유는 뭘까. 그 많은 피해자의 집단적 상처보다는 가해행위에 가담한 사람의 인권과 명예에만 온통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유신체제 억압의 상징인 긴급조치는 언젠가 한 번 불거질 문제였다. 민주주의 사회로의 완전한 이행을 위해서도 그렇다. 이 현재 진행형의 아픔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결론적으로 보수세력이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게 좋을 듯하다. 유신과 긴급조치의 주역이 보수세력이었기에.

    지금 보수세력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절정에 이르고 있다. 이들이 주축이 된 한나라당은 정당 지지율이 50%에 달하고, 집권의 가능성도 매우 높다. 진보세력의 포퓰리즘과 실정(失政)에 대한 국민의 비판도 거센 상황이다. 이미 중요한 의제가 돼 버린 긴급조치와 유신체제 문제에 대한 적극적 해결은 보수세력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일 수 있다.

    지난날 한국 보수의 약점은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방어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젠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역발상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록 진보세력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정면돌파하면 어떨까. 만일 긴급조치와 유신독재의 폐해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자신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공동체 전체를 포용하고 통합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보수세력이 침묵을 깨는 순간 '억울한 세대'도 비로소 맺혔던 응어리를 풀 수 있다. 시간이 흐를 만큼 흘러 고백과 반성을 수용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에 대한 보수세력의 결정적 공로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길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18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의 견해를 빌리지 않더라도 부단한 자기쇄신은 보수의 중요한 가치다.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고서는 "지키고 유지하자"고 호소하기 어렵다.

    진보세력도 분열이 아니라 화해가 목적이라면 상대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 보수와 진보는 서 있는 지점이 다르지만 합리적 경쟁을 통해 얼마든지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법률적으론 오래전에 폐기됐지만, 심리적으로는 현재 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는 긴급조치를 '해제'하는 데 두 세력이 협력한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