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이두아 변호사가 쓴 <“진심을 몰라준다” 국민 탓하기 전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기업을 경영하거나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거나 혹은 어떤 집단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의 생각을 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한다.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으면 개인 간 집단 간에 필연적으로 오해가 쌓이기 마련이다. 오해의 증가는 상호불신으로 발전하여 당사자와 주변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힌다.

    23일 저녁 노무현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분이 시청률에 자신이 없어 인기 드라마의 방송 시간을 일부러 골랐다는 ‘오해’를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먼저 분명히 말씀드린다. 60분에 걸친 연설의 핵심은 ‘나는 억울하다’는 한마디였다. 국민들이 진심을 몰라준다는 얘기였다. 대통령과 국민 사이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처절한 고백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진의(眞意)를 고의로 왜곡하는 문제 집단이 있다고 말문을 연 뒤, 신문 방송을 포함한 언론사를 싸잡아 공격했다. 자신에 대한 낮은 지지도와 사상 유례가 없는 저평가는 국민들이 대통령의 진의와 업적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에 생겨난 오해라는 것이다. 취임 이후부터 줄기차게 특정 매체만을 콕 집어 공격하던 노 대통령이 최근 들어 대다수의 신문과 방송을 모두 실명으로 거론하며 비난하는 것을 보면, 이제는 대통령과 다른 언론사 간의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생긴 듯하다.

    그렇다면 왜 노 대통령은 주변의 사람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것일까.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에 대략 두 가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첫째, 인의 장막이 고의로 정보를 차단하고 있다는 혐의다. 막중한 업무가 몰려있는 최고 지도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쓸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 업무의 효율성을 높여주는 것이 참모진의 기본기능이다. 문제는, 지도자의 측근들이 이러한 ‘게이트 키퍼(gatekeeper)’ 역할을 수행하면서 ‘자신과 특정 이익집단의 구미에 맞도록’ 정보를 가공하고 차단하는 경우다. 과거 중국의 전제군주 체제하에서 환관과 내시에게 쏟아졌던 백성들의 원성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국민들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국민들이 그의 발언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일관성과 논리가 부재한 탓이다. 국민을 하늘같이 알겠다던 분이 ‘이제 국민들로부터 평가받는 것은 포기했다’고 하고, 지지자들 앞에서는 ‘반미면 좀 어떠냐’고 일갈했던 분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는 ‘6.25때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쯤 북한 어딘가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측근들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집 사는 사람은 엄청나게 후회할 것, 세금 폭탄을 때려서라도 집값을 잡겠다고 호언하던 분들이 투기지역으로 지정된 강남의 요지에 큰 평수의 아파트를 앞다투어 장만했다.

    대통령은 단순한 일개인이 아니다. 국민들과 국제사회는 어느 나라가 되었든 대통령의 말과 행동을 일일이 기록하고 보존한다. 그의 말과 행동이 그 나라 국민의 위임을 받아 행하는 국가의 공식 입장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과 행동은 그래서 신중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 장관 시절과도 다르고 국회의원 시절과는 더더욱 달라야 한다. 훌륭한 대통령은, 대내적으로는 자신의 지지자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찍지 않은 사람들도 모두 포괄하는 지도자여야 하고, 대외적으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나라와도 무리 없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분명히 한국어로 이야기했는데도, 기자회견 다음 날 측근들이 ‘발언의 진의는 그것이 아니었다’라며 주석과 해석을 덧붙이는 일 만큼 ‘의사소통의 실패’를 증명하는 사례는 없다. 의사소통의 실패에서 생겨나는 오해는, 발언의 당사자가 속마음을 숨기고 무언가를 감추거나, 혹은 자신이 하는 말을 자기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 생겨나기 마련이다. 국민들 살림살이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언제까지 남 탓만 하고 있을 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