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문갑식 논설위원이 쓴 '대통령의 충신, 나라의 간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한국노총 이용득 위원장이 바른말도 상대를 잘 골라해야 한다는 교훈을 새해 벽두부터 보여줬다. 그는 최근 경제점검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말을 아껴 달라”고 고언했다가 “(당신이나) 말을 가려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용(임금)의 비늘(심기)을 거꾸로 건드리면 죽임을 당한다는 ‘역린(逆鱗)의 죄’가 바로 이런 상황을 빗댄 것이다.

    “(회의)며칠 전 대장내시경을 했는데 폴립(polyp·양성종양)이 30개나 나왔어. 몸도 안 좋은데 괜히 가서 한마디 했다가….” 안 가도 될 자리에 갔다가 안 가느니만 못하게 된 그가 억울해하며 한 말이다.

    이 위원장은 작년 비정규직법, 노사로드맵 관련법 개정의 주역이었다. 민주노총으로부터 ‘변절자’라는 욕까지 먹었지만 밀어붙였다. 이 위원장이 없었다면 대통령의 노동 청사진은 사산(死産)될 처지였다.

    대통령에게 망신당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도 그런 이 위원장을 ‘그래도 마지막까지 대통령에게 바른말 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노동계 대표까지 묵사발 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이제 아부만 하거나 아니면 입 다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2002년 4월의 대통령은 이렇지 않았다. 당시 경남 김해 돛대산에 중국 민항기가 추락했을 때 경선후보였던 대통령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1시간 간격으로 유가족들이 있던 김해시청에 왔다. 이 후보는 덜컥 앞문으로 들어와 마이크를 잡았다가 유가족들에게 욕만 먹었다. 노 후보는 뒷문에서 유가족들을 껴안으며 앞으로 왔다. 측근이 마이크를 내밀자 “이 상황에서 무슨…. 그냥 가지”라고 했다. 이 한마디가 분위기를 확 바꿨다.

    지지자들은 그 모습을 보며 “막노동을 하면서 밑바닥을 겪은 사람은 귀족 출신과 달라도 뭔가 다르다”고 했다. 대통령은 고교 졸업 후 몇 달 부산부두와 울산비료공장에서 막노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4년이 넘은 지금 대통령 주변에서는 막노동 경험이 막말의 원류인 것 같다는 핑계가 나온다. 그 때문에 피해 보는 게 대통령을 지지했던 죄 없는 노동자들이다. 엉터리 정책으로 노동자만 죽어나는 것은 둘째 치고 교양의 수준에 관계없이 ‘노동자는 막말이나 하고 무식하다’고 오해받고 있다.

    국가 리더가 된 인물 중에 어려운 가정 사정 때문에 막노동을 경험한 사람들이 꽤 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광산과 공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쿠바혁명의 주역 체 게바라도 원래는 의학도 출신이지만 부두노동, 말 사육 등 이런 저런 막노동을 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정반대다. 흐루시초프는 평소 거친 말투와 UN회의장에서 구두를 벗어 탁자를 치는 등의 기행 때문에 천박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반면 게바라는 사후 40년이 되도록 낭만적인 우상이 되고 있다. 결코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대의 피투성이 구세주’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잔인했던 그의 성격은 책을 들춰봐야 겨우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막노동 경험이 아니라 그런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를 어떻게 표현하느냐라는 걸 두 사람의 사례는 보여준다.

    대통령의 노동자 경험도 한때는 국민 마음을 휘어잡았지만, 이제 때로는 엉뚱하게 돌출되고 있다. 최근에는 청와대브리핑 ‘편집국장’이 되는가 하면 당장 오늘 살기도 힘겨운 국민들 앞에 20년간 뭘 하겠다고 불쑥 원치도 않는 청사진을 내미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청와대, 시민단체, 영화계, 종교계에 있는 대통령의 측근들은 대통령을 말리기는커녕 “독감 바이러스 몰아내듯…”이라며 한술 더 뜨고 있다. 왕조시대의 간신(奸臣)이 바로 이런 모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