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란에 전봉관 KAIST 인문과학부 교수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 말처럼 ‘군대에서 썩어본 사람’은 안다. 20대 초반, 한창 공부하고 일할 나이에 군대에서 청춘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힘겹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대통령 말처럼 ‘군대에서 썩으면서’ 한번쯤 왜 나처럼 힘없고, 평범한 사람만 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원망해 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거다.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필자 역시 가끔은 ‘군대에서 썩는다’는 표현을 쓰고, 군 복무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지난 연말 대통령이 작심하고 내뱉은 군 비하 발언과 잇따라 터진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는 선물 보따리가 반가웠느냐 하면, 시쳇말로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군대에서 썩는다’는 말이 군 최고통수권자가 입에 담기에는 너무나 염치없는 발언이었다. 만일 혹한의 추위 속에서 청춘을 바쳐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는 60만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썩고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만든 궁극적인 책임자가 바로 군 최고통수권자인 대통령이다. 설령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군대에서 썩는다’는 표현을 쓰더라도 대통령만큼은 그렇게 말해서 안 되는 것이다. 집권 초기도 아니고, 지난 4년 동안 뭐 하고 있다가 이제 와서 군대를 청춘을 썩히는 곳으로 비하(卑下)하는가.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썩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군대에서 썩지 않을 방법부터 마련하는 것이 책임 있는 리더의 자세다. 아무리 복무 환경을 개선한대도 군인이 민간인만큼 편하고 안락하게 지낼 수는 없다. 군 복무 환경의 개선만으로는 군 복무에 따른 상실감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군인에게 그동안 상처받은 명예와 자긍심을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군 복무가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경험이 될 수 없다면 복무 환경이 아무리 개선되고, 복무 기간이 아무리 짧아진대도 군대는 여전히 청춘을 썩히는 곳일 수밖에 없다. 군 비하 발언으로 대통령은 가뜩이나 상실감을 겪고 있는 군인에게 더 큰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군대에서 ‘썩을’ 젊은이들을 위해 대통령이 난데없이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헤친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북핵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고, 전시작전권 환수 계획을 철회한 것도 아니고, 병역 자원이 갑자기 증가한 것도 아닌데 대권 후보도 아니고, 집권 초 군 복무기간을 2달 단축한 현직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군을 비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풀어헤치니 그 심오한 속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군대에서 길게 썩을 것을, 짧게 썩게 해주겠다는 대통령의 선물은 받으면서도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복무기간 단축이라는 대통령의 깜짝 선물은 적어도 입대를 앞둔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매우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다. 한두 달도 아니고 6개월씩이나 줄여 준다니 황공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군 전력이야 어떻게 되건, 세금 부담이야 얼마나 늘건 대선을 코앞에 둔 마당에 야당이 대놓고 반대할 것 같지도 않다. 지난 대선에서 대통령이 톡톡히 재미를 본 ‘수도 이전 공약’이 그랬던 것처럼, 한번 내뱉은 이상 그대로 추진될 수밖에 없는 외통수 정책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대통령의 화법이야 설마 다음 정권에까지 이어지기야 하겠는가만, ‘선물 보따리’만큼은 다음 정권으로 이어져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것임이 분명하다.

    그냥 준다고 모두 선물은 아니다. 주는 이의 충심과 사랑이 묻어 있어야 선물이지, 그렇지 않으면 이득을 바라는 뇌물이거나 사기를 위한 미끼일 뿐이다. 12월 19일에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는 아직 1년이나 남았다. 야당 후보가 독주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올해는 달갑지 않은 선물 보따리를 얼마나 더 받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제발 이번 선거만큼은 대한민국의 안보와 성장 잠재력을 희생하면서까지 무책임한 ‘선물 보따리’를 풀어 놓는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