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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6일자 오피니언면에 언론인 류근일씨가 쓴 칼럼 '노짱이 막 나가기로 한 까닭'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갈 데까지 간 ‘막말 대통령’ 노무현씨는 정말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런 그를 섣부르게 대통령으로 들어올렸다가 이제 와서 뒤늦게 “나는 안 그랬다”고 슬쩍 손을 놓아버린 유권자들은 그렇다면 ‘추락’의 공동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2002년 12월 19일 오후에 갑자기 투표장에 우우 몰려 나가 노무현 후보에게 ○표를 찍어 준 사람들, 그래 놓고 나중에 와서는 또 “잘못 찍었다”며 딴소리를 하는 사람들부터가 우선 그렇다. 그리고 그런 자녀들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 채 속절없이 방치했다가 졸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부모 세대 또한 그때의 교훈을 통렬하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일부 지식 엘리트임을 자임하는 사람들도 과연 ‘대통령 노무현’에게만 모든 잘못을 몽땅 뒤집어씌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삶의 질(質) 향상을 위해선 마르크스류(類)의 ‘단절적 변혁’이 더 나은 것인가, 아니면 베른슈타인류(類)의 ‘점진적 진화(進化)’가 더 나은 것인가? 적잖은 비(非)좌파 지식인들까지도 1980년대 이후 젊은이들에게 후자(後者)보다 전자(前者)를 더 열심히 ‘판촉(販促)’하고 다녔음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 집권’ 이후에도 유권자들의 ‘인과응보’는 한둘이 아니었다. 우선, 탄핵사태 직후 열린우리당에 원내 과반수 의석을 안겨 준 것이 누구였던가? 바로, 유권자들 자신이었다.
‘노무현 치세’ 2년쯤 되었을 때, 유권자들은 비로소, 너무 늦었지만, ‘아차’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파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일부 안일한 보수층은 우파 운동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뜨거운’ 감자 취급을 하고 있다. 예컨대 재벌들이 체제를 파괴하려는 좌파 운동에는 뒷돈을 대면서도, 체제를 지키려는 우파 운동에는 땡전 한푼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 없이 소득 없다”를 외면하는 공짜 심리라고나 할까.
체제의 엄연한 수혜층이면서도, 김정일이 핵실험을 하든 말든, 탈북 여성들이 인신매매를 당하든 말든, 한·미 동맹이 금 가고 군 통수권자라는 사람이 국방의무를 ‘썩는 것‘이라고 비하하든 말든,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냐는 듯 덤덤해하는 사람들 또한 너무나 많다. 이런 무감각한 유권자들에겐 그래서, 노무현씨야말로 가장 분수에 맞는 대통령일지도 모른다.
그가 며칠 전 그토록 작심하고 막말을 해댄 까닭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믿는 데가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위태로워져도 보수국민 중엔 무사태평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 유권자의 25%는 확고한 ‘반(反)주류’라는 것, 군복무 단축 등 ‘깜짝 쇼’로 홀릴 수 있는 유권자가 또 그만큼은 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노무현의 남자’가 박빙의 차이로 또 한 번 막판 뒤집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확신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의 ‘파격 연설’은 이 점에서 단순한 ‘우발(偶發)’이 아니라, 잘 조준된 작전이었을 수 있다. 반미(反美)주의, 김정일과의 ‘민족공조’ 기성 주류(主流) 타도, ‘낙동강의 용(龍)’ 등 ‘2002 처음처럼’을 다시 한 번 결집해서, 그 분명한 정체성으로 ‘중간’과 부동(浮動)층을 공략해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의 ‘이쪽에도 예쁘게 보이고, 저쪽에도 예쁘게 보이고’의 ‘다중(多重) 인격’ 플레이가 과연 두 토끼를 다 잡을지, 아니면 둘 다 놓칠지는, 굳이 그렇게 하겠다니 지켜 볼밖에 없다.
절대다수 유권자들이 ‘노무현 시대’의 ‘결과’에 대해서는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선동정치를 결실시켰던 대중 심리적 ‘원인’이 상존하는 한, ‘노짱’의 육두문자 식 ‘막가자는 것’은 충분히 나올 법한 노림수였다. 그렇다면 핵심은 결국 유권자 대중이며, 대중이 과연 깨어 있는 공민(公民)으로 거듭날 수 있느냐의 여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