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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에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이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정부가 내년 과거사 진상 규명에 쓰겠다며 올해 예산 2168억원보다 무려 81%나 늘린 3950억원을 신청했다. 과거사 기구의 본산 격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외국 방문에만 7억원 가까운 돈을 청구했다. 지금까지 접수된 사건 마무리에 전념해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외국 현지 조사가 왜 필요한지 의문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후 과거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래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과거사 위원회만 10여 개이고, 여기 딸린 식구만 600여 명이다. 이들이 쓴 국가 예산은 내년 몫으로 청구한 계산서까지 합하면 6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6000억원이면 돈 없는 역사학계에선 천문학적인 액수에 해당한다. 이 돈을 장기적 계획 아래 제대로 된 역사 연구에 쓴다면 얼마나 역사학의 기초가 탄탄해지고 번듯한 성과들이 쏟아져 나올까.
지금은 식민 잔재 청산이 필요한 해방 직후도 아니고, 군사정권에서 갓 벗어난 민주화 이행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부는 출범 초부터 느닷없이 과거사 단죄를 들고나오며 우리 사회를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놓았다. 그 결과가 결국 ‘과거사 업자(業者)’들을 위한 일자리 만들기와 국민 세금 쏟아붓기였던 것이다.
이들은 재탕, 삼탕의 중복 조사도 서슴지 않는다. 민청학련사건은 현 정부의 국정원과 경찰청 과거사위에서 동시에 조사했는데 김대중 정부에서 이미 다룬 사건이다. 몇 년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에 접수돼 조사를 거친 사건들이 다시 진실·화해과거사위와 군(軍)의문사위 등에서 재탕되고 있다. 진실·화해과거사위라는 통합 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정원, 경찰청, 군에 과거사 기구들이 난립해 있기 때문이다. 사건 특성상 시간이 흐를수록 새 증거를 찾는 것은 더 어렵기 때문에 재조사는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일거리 만들기일 뿐이다.
현 정권은 진실 규명을 할 뿐 보상이나 처벌은 없다는 걸 강조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이번 과거사 관련 예산 급증도 보상비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인혁당사건의 경우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조작으로 발표하자 민주화보상심의위에서 이들을 민주화 운동가로 인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 관련 유족들도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짜리 소송을 냈다. 이런 사태는 사람들의 물질적 이해관계를 자극해 ‘묻지마’식 사건 접수를 낳고 과거사 기구에선 인력 부족 타령을 늘어놓게 된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민원인과 과거사 기관의 공생과 담합이 이뤄지는 것이다.
과거사 업자들은 권위주의 시대의 주요 공안사건에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조사를 벌이고 있지만, 결정적인 증거 없이 이해 당사자인 피의자의 주장에 의존해 의혹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내놓고 있다. 어떤 사실을 믿지 않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무작정 ‘조작’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KAL 858기 폭파사건, 남한조선노동당사건은 결국 아무런 조작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정 세력이 의혹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세금을 낭비한 어처구니없는 사례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에 대한 자학과 폄하라는 지독한 편견에 빠져 있는 과거사 기구의 주도자들은 법적 전문성도 없이 다수결로 사실상 사법적 판결을 내리는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모두가 동의하는 중립적 역사 기술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때문에 역사의 무대에선 서로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 경쟁하는 게 바람직하다. 특정한 역사 해석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현실 권력까지 휘두르게 될 때 인간에게 가장 난폭한 억압인 사상 통제가 벌어진다. 현 정부의 과거사 기구들은 ‘역사 바로잡기’라는 명분 뒤에서 일 만들기와 예산 부풀리기에 여념 없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국민 세금을 흥청망청 쓰는 것도 바로잡아야겠지만 이들이 제멋대로 사법부 기능까지 떠맡아 ‘무면허 운전’으로 대한민국의 진로를 위협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