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6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 '통일이 무섭습니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5·31 지방선거 직전이었습니다. 당시 정동영 열린우리당 당의장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민주·평화·개혁세력을 묶을 큰 틀이 필요하며 열린우리당이 단단한 구심점이 돼야 한다.”

    필자는 정 의장의 이같은 말을 접하면서 그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는가보다는 오히려 교묘한 말솜씨에 관심이 끌렸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열린우리당이 민주·평화·개혁세력이라면 반대 진영은 자연히 반민주·반평화·반개혁 세력이 돼버리는 것이죠. 점잖게 자기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 실질적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욕설과 비난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트릭(술수)인 셈입니다.

    이탈리아의 정치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를 ‘언어 헤게모니’라고 표현했다더군요. 하지만 그리 어렵게 말할 필요가 있나요? 그저 말장난이라고 하면 간단한 것을 말입니다. 하긴 요즘 한국사회를 풍미하는 민족주의자나 남북 통일론자들의 구호나 외침 속에서도 이런 말장난은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이에 6·15남북공동선언이 채택된 이후 이런 현상은 부쩍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정상회담에서 유독 강조된 용어가 뭔지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자주적 통일’이요, ‘우리 민족끼리’입니다. 자 이제 하나하나 살펴봅시다. 만일 김대중·김정일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나 정치 세력은 자연히 반통일·반민족세력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죠. 북한 핵실험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북한 권력 집단의 비상식적 행태를 우려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런 비판이 제기되자마자 일부 진보 매체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반(反)통일 주장들이 신문을 장식하고 있다”며 반박하더군요. 놀랍지 않습니까? 정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좋습니다. 필자는 이제부터 반통일·반민족 세력의 한 사람으로서 평소 지니고 있던 몇가지 의문점을 밝혀보겠습니다. 먼저 통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 보죠.

    통일지상주의자들은 통일이야말로 한반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풀어줄 천국의 열쇠인 것처럼 외치고 다닙니다. 그런데 이들 세력이 유독 침묵을 지키는 대목이 있습니다. 과연 북한의 누구와 통일하자는 것이냐라는 질문에 대해서입니다. 통일이라, 그래 좋다, 그럼 어떤 통일인가라고 질문을 바꿔봐도 좋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평화통일이니, 자주통일이니 해봐야 거기에는 결국 현 김정일 체제를 인정하고 그대로 유지하자는 전제조건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평화니, 자주니 하는 용어들이 중요해지는 것이죠. 그분들이 원래부터 평화나 자주를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민족 또한 현재로서는 대단히 수상한 용어입니다. 한국 사회 진보·좌파들의 민족 개념은 사전적 차원에 머물고 있겠지만 북한의 민족 개념은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곽대중 저 ‘한국 시민운동의 북한 인권문제 무관심에 대한 고찰’에 따르면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김일성민족’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995년 1월18일의 평양방송은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민족”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민족끼리’는 한국의 4800만 인구와 북한의 김일성 수령 집단으로 이뤄지는 것이며 정작 김정일 체제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2200만 북한 주민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형태가 되는 것입니다. 아니, 이에 머물지 않고 한국의 4800만명조차 어느날 갑자기 한민족에서 김일성민족으로 탈바꿈할지 모릅니다.

    한국의 진보·좌파들이 이토록 북한 독재정권의 존속을 꾀하고 더 나아가 김정일 지도자 동지를 떠받들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참으로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입니다.

    한국 사회는 이제 6·15선언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귀여운 자식들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 통일하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데모 현장마다 얼굴을 내비치는 한복 입고 수염 기른 아저씨들을 위해 통일하자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