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3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한석동 논설실장이 쓴 <'잃어버린 15년'>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민주화운동 세력의 민주화 이후 행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대다수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어떤 형태로든 국정을 주도했거나 수행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원래 직업이 정치였다. 야박하게 말하면 이런 사람들의 민주화운동은 곧 생업이었다. 민주화운동을 애당초 정치 입문의 발판으로 삼은 부류도 같은 범주에 든다고 볼 수 있다. 짝퉁들이 진품 대열에 기생해 세도를 부리는 경우도 물론 많다.

    앞의 군(群)에 속한 사람들은 민주화운동 경력을 더는 훈장처럼 내세우지 않는 게 좋겠다. 이런 부류는 순수성에서 세 유형 가운데 하치(下値)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을 시발로,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까지, 과거의 노고를 어지간히 상쇄할 만큼 영광을 누렸지 않으냐는 말이다.

    이들과 달리,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뒤 평범한 시민으로 복귀한 사람도 많다. 배경이 어떻든 그들의 담백한 성품에 경의를 표한다. 정치와는 무관한 분야에 종사하면서, 민주화운동 연장선에서 묵묵히 사회운동에 이바지해온 사람들의 열정은 숭고해보이기까지 한다.

    얼마 전,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가 김대중(DJ)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失政)’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그는 우리가 자유롭고 민주적 희망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 단단한 기초를 닦은 덕분이라며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대북정책 등을 맹공했다. 앞서 그는 “충청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라 운명이 결정된다”고 했었다.

    사실 JP는 두 사람을 비판할 입장이 못된다. 우리 헌정사의 가까운 몇 차례 고비에서 거의 매번 정치 왜곡의 중심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1990년, 3당합당 주역의 한 당사자로, 92년 김영삼(YS)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해 권력을 공유하던 중 팽당했다. 그 뒤에는 DJP연합 ‘요술’로 97년 김대중 정권 창출에 공헌하고 국무총리를 지낸 다음 DJ와 결별했다.

    DJP 두 사람이 손잡고 국민 앞에 했던, 그러나 내심 그들 스스로도 실천을 믿었을 리 없는 ‘내각제 개헌’ 약속은 당연히 흐지부지됐다. DJ는 3당합당을 ‘야합’으로 줄기차게 공격했었다. 노 대통령이 YS의 발탁으로 정치를 시작해 DJ 정권을 승계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언젠가 JP는 DJ, YS를 “근대화 과정에서 삽질 한 번 안해본 자들”로 깔아뭉갰다. 화자(話者)가 문제여서 그렇지 일리는 있다.

    ‘시대정신을 아는 진보적 집권당’에서 급기야 목불인견(目不忍見)의 배반·파열이 시작된 즈음이다. 권면 겸 해서, YS정부 시절 대통령 교육문화수석비서관을 지낸 ‘민주화운동 대부’ 김정남씨가 최근 월간중앙에 쓴 글 ‘잃어버린 15년’의 일부를 인용한다.

    “민주화운동 세력에 대한 국민 일반의 암묵적 평가는 무경륜 무책임 경조부박 무능 부정부패 무례 독선 오기 패거리 코드 같은 것들이다. …국민은 이들이 정권 담당자인지, 아직 투쟁하는 사람인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들 정권은 지금까지의 위화와 갈등 위에 세대와 코드, 있는 자와 없는 자, 80%의 국민과 20%의 국민, 서울과 지방, 강남과 강북, 좋은 대학 나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부동산을 못 가진 98%와 가진 2%, 북한 지원에 온정적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코드에 따른 네편 내편으로 갈갈이 갈라놓고 찢어놓았다.”

    김 전 수석은 “이제 국민은 더 이상 정치적 꼼수가 있는 이벤트나 정치실험 따위에 속지 않을 것이다. 이미지 따위에도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이벤트에 속아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럴까. 3김 극복을 외쳤지만 그 정치 선배들 뺨치는 재사들이 대선승리 비방(秘方)을 궁리하며 곳곳에서 포진을 개시했다. 결정적 시기에 북한 정권이 뜨거운 동포애로 ‘찬조출연’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남북 정상회담,(선거 뒤 백지화를 염두에 둔)핵무기 폐기선언 등 선택적 평화공세…. 여전히 ‘지뢰밭’은 널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