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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속(續) 배신의 계절'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권의 말기에다 대통령 선거를 1년여 앞둔 시점에 우리는 여러 행태의 배신(背信)을 본다. 집권여당의 내부에서는 정계개편을 겨냥한 이합집산(離合集散) 과정에서 어제의 동지들끼리 서로를 헐뜯고 배신하는 사태가 빚어지는가 하면, 집권을 떼어놓은 당상쯤으로 여기는 야당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대선주자(走者) 간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조짐이 달아오르고 있다.
불과 3년 전 자신들을 권좌에 앉혀준 정당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지역탈피와 전국정당화를 명분으로 새 정당을 만든 사람들이 이제 다시 지역을 볼모로 흘러간 퇴역 장수를 끌어내 ‘제2의 배신’을 도모하려는 집권여당 사람들은 추해 보인다. 정권을 잡고 내주는 것을 정치의 순기능으로 보는 시각과 경험이 없는 우리의 정치풍토하에서 권력의 상실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이들에게 판 뒤집기의 배신과 배반은 살아남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초미의 관심사는 여권의 판 뒤집기가 아니라 어쩌면 한나라당 내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경선(競選)의 배신극에 있다. 여권세력의 이합집산이 어제의 정치가 낳은 산물인 데 비해 한나라당의 경선드라마는 나라의 미래를 좌우하는 주요한 축(軸)이 될 것이기에 그 배신의 여부는 국민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다. 내년 대선의 향방은 여당에서 누가 후보로 나오느냐에 달렸다기보다 한나라당의 후보가 분열하느냐 단일화하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선거를 1년1개월, 후보경선을 7개월 정도 앞둔 이 시점에서 한나라당의 당내 경쟁은 벌써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경쟁은 아직은 표면으로 부상하지 않고 있지만 물밑에서 끓고 있는 형국이다. 그 정도는 치열하다 못해 치사하기까지 하고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배반의 정치는 경선결과에 승복하느냐를 놓고 극치에 달할 것이다. 경선의 과정이 치열하면 할수록, 경선의 양상이 대등하면 할수록 그 결과에 흔쾌히 승복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경선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갈 것 같지는 않아 그 과정과 결과를 예측하기 더욱 어렵다. 그러나 대선주자들은 그럴수록 경선의 결과와 당의 결정에 배신하지 않고 패배하면 대통령에의 꿈을 접는 것이 대의(大義)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과거의 예로 볼 때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 또는 세력과 자신을 믿고 따라준 참모와 운동원들이 경선에서 질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이냐?”며 “당신은 본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매달릴 때 후보들은 경선에 불복하고 독자 출마하는 결정을 했던 역사를 우리는 갖고 있다. 이에 각 대선주자 진영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헐뜯고 중상모략하는 정도가 열을 더해가는 요즘의 상황으로 미루어 참모나 운동원들 간의 알력은 주자 자신들의 대립보다 더 심각하고 악성(惡性)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크다.
좌파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대한민국을 제 궤도에 올릴 새로운 정치역량을 기대하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한나라당의 경선승복과 후보단일화가 지상의 과제다. 그런데 지금 한나라당의 대선주자들은 경선결과 승복을 묻는 질문에 원론적이고 교과서적인 대답에 머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국민의 신뢰를 절대적으로 확보하는 길은 경선결과에 대한 승복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지금 이름이 거론되는 세 사람의 대선주자가 빠른 시일 안에 모여서 경선에 승복한다는 것을 국민 앞에서 공동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누구든 먼저 자신의 경선승복을 국민 앞에 선서하는 사람이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을 것이고 그것은 틀림없이 경선승리로 이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주자의 참모들끼리 공동으로 경선승복을 약속하는 절차를 밟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어느 주자 한 사람의 진영만이라도 경선승복을 공약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절차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 주자들은 발을 빼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배신의 정치, 배반의 술수가 횡행한다면 그것은 한나라당의 자멸로 귀결될 것이다. 지금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가 주춤한 것은 어찌 보면 한나라당의 분열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희망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나라당이 분열되면 여당은 판을 다시 짜서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의 경선불복(不服)은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배신의 결정판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