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 '태평로'란에 이 신문 주용중 논설위원이 쓴 '대통령의 귀, 오디세우스의 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 마음속이 궁금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국민이 원하는 길이 분명한데 그 길은 놔두고 엇길만 걷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며칠 전 그럴 법한 해답을 들었다. 대통령을 그리스 신화의 영웅 오디세우스에 비유하는 대통령 지지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오디세우스가 황홀한 노래로 뱃사람을 꼬드겨 파멸시킨다는 세이렌족(族)의 섬을 지날 때였다. 오디세우스는 밀랍을 녹여 동료들의 귀를 막는다. 자신의 몸은 밧줄로 돛대에 꽁꽁 동여맨다. “배를 멈추고 우리의 노래를 들으세요. 그러면 즐겁고 많은 지식을 얻게 되죠.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죠….” 세이렌족의 노래에 홀린 오디세우스가 “밧줄을 풀라”며 몸부림친다. 그러나 동료들은 오디세우스가 미리 부탁한 대로 묶은 밧줄을 더욱 조인다.
요즘 대통령은 측근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아 놓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꽁꽁 붙들어 맨 듯하다. 오디세우스보다 한술 더 떠 자신의 귀까지 밀랍으로 봉한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시 작전통제권 단독행사가 때 이르다는 국민들의 호소가 그렇게 절절한데 “오늘이라도 당장 가능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북 포용정책을 고치라는 함성이 우레처럼 울리는데 “북한이 핵 개발해도 군사 균형이 깨지지 않는다”며 태평가를 부를 수는 없다. 2005년 이후 재보선에서 40대0으로 완패한 여당이 이 간판으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판인데 전직 당 의장에게 “전당대회서 누가 옳은지 겨뤄 보자”고 말할 수는 없다.
대통령이 기존 정책을 바꾸라는 민성(民聲)을 세이렌족의 노래쯤으로 여기지 않고서야 사사건건 이럴 수는 없다. 대통령은 5·31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대패했을 때 이미 그런 기미를 보였다. 대통령은 “민심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겠다. 선거에 한두 번 지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흐르는 게 민심이니 지금 민심과 나중 민심이 다를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민심을 따르기 위해 노선을 바꾸면 죽도 밥도 안 될 것 같으니 지금 민심을 거스르면서 나중 민심을 기약하겠다는 것이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를 비롯한 10%대의 지지자들은 이런 대통령을 오디세우스처럼 떠받든다. 그래서 지역별 모임을 갖고 “시대적 소명이 남았으니 역할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있다.
대통령이 소수의 길, 역발상(逆發想)의 길을 고집하는 데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정치적으로 계속 역풍을 맞았지만 결국 대통령이 됐다. 역풍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고 했다. 대통령 말대로 대통령은 역발상으로 역풍을 이겨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역발상은 승부의 세계에선 통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정(國政)의 세계, 외교의 세계에선 투전판식(式) 역발상은 발붙일 곳이 없다. 북핵을 둘러싼 국제무대는 한국의 카드가 역발상이든 순발상이든 제대로 먹히기 힘들 만큼 냉엄하다. 미국과 중국, 일본, 북한마저 ‘자주’와 ‘대북 퍼주기’에 올인한 이 정부 머리 위로 공을 넘겨주고 넘겨받았다. 정부가 아무리 역발상을 해도 그 역발상을 또 다른 역발상으로 뭉개 버린 대표 사례가 부동산이다.
지금 대통령이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는 소리는 세이렌족의 노래가 아니다. 밀랍을 귀에서 파내고 밧줄을 몸에서 풀라는 마지막 사이렌이다. 대통령이 끝내 착각에서 못 벗어나면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이카루스의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 가까이까지 신나게 날아올랐다가 밀랍이 녹아 버려 추락했다. 문제는 대통령이 추락하면 국민도 동반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