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장규 시사미디어 대표이사가 쓴 <남한판 '고난의 행군'>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이 핵실험 사태 이후 "고난의 행군"을 들먹이고 나섰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던 1995~98년 사이의 기근을 가리켜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고 하는데, 한반도에서 또다시 그런 굶주림 사태가 벌어진다는 말인가.

    '고난의 행군'은 원래 1930년대 말 김일성이 주도했던 항일투쟁 과정에서 굶주림과 병마를 무릅썼던 100여 일의 행군에서 유래한 말이다.

    최근 다시 고난의 행군을 운운하는 걸 보면 결코 심상찮다. 외세에 항복을 하느니 차라리 백성 모두가 굶어 죽는 길을 택하겠다는 식이다. 따지고 보면 '고난의 행군'이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사람들이 먹거리가 없어 사방에서 굶어 죽어가는 판에 행군은 무슨 얼어 죽을 행군이라는 건가.

    이런 북한을 도저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 할 순 없다. 미국은 깡패집단이라 했는데, 이 또한 번지수가 틀린 비유다. 어떤 깡패 두목이 자기 조직의 똘마니들이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는가. 남을 두들겨 패고 협박을 해서라도 제 식구들은 배불리 먹이는 게 깡패사회다. 더구나 잘 구슬리고 타이르면 말도 통하는 법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북한은 결코 깡패집단이 아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북한 정권과 군부는 한마디로 사람을 홀리고 세상을 기만하는 사교(邪敎)집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사이비 종교집단이 핵실험의 총지휘자요, 스스로 제2, 제3의 국민적 '단식 항거'를 선언하고 나서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걱정인데, 도무지 터널의 끌이 어디쯤 될지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자칫하면 90년대 기근 때와는 비교도 안 될, 훨씬 더 참혹한 국면으로 전개될 수도 있다. 기름도 돈도 식량도 완전히 끊어진 북한 체제가 과연 무슨 일을 저지를까를 생각하면 소름이 좍 끼친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일어난다고 치자. 아무리 낙관적으로 봐도 지금의 교착 상태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인 것 같다. 이렇게 되면 북쪽만 고난의 행군이 벌어지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남쪽에서도 이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바로 머리 위에서 핵실험이 벌어지고 '고난의 행군'이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면 남한인들 어찌 멀쩡할 수 있겠는가. 골병들어 가는 과정이 벌써 진행되고 있다 해야 할 것이다.

    남쪽이 겪게 될 고난의 본질은 물론 식량 부족 따위가 아니다. 위기 의식은커녕 최소한의 합의, 최소한의 질서, 최소한의 리더십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극심한 분열 속에 나라 전체가 갈등과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고난의 본질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했으니, 지금부터라도 차분히 따져 나가자.

    우선 몇 가지 분명한 게 있다. 첫째 어떤 시나리오로 가든 북한의 장래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는 점, 둘째 그리하여 그 불행의 뒷감당은 남한의 몫이 될 것이라는 점, 셋째 북한 붕괴는 도저히 점칠 수 없는 방법과 시점에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질 것이라는 점 등이다. 결국 북한은 어차피 한국 경제가 짊어져야 거대한 짐이요, 부담인데도 이를 감당할 능력이나 준비 태세는 전혀 안 돼 있다는 걱정에 봉착하게 된다.

    어떤 외국 학자는 북한 붕괴가 통일을 통한 코리아의 재도약 기회라 했다. 나는 지극히 부분적으로만 찬성이다. 자칫하면 재도약의 엄두도 내보기 전에 한국 경제는 깡그리 날아가 버릴 소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까짓 경기부양책을 쓰고 안 쓰고의 차원이 아니다. 북쪽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메가톤급 악재들이 어떤 식으로 한국 경제를 옥죄어 올지 상상조차 하기 싫다.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어떻게 극복해 내느냐에 따라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흥망이 결정될 운명에 처해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