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9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초등학생은 피지배자?'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4년 전 무명(無名)이다시피 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 사람에 따라 또는 이념 성향에 따라 반응과 평가가 각각 달랐었지만 한가지 공유한 점은 있었다고 본다. 비리 속에 정체된 기득권과 반대를 수용할 줄 몰랐던 주류계층을 탈피한 새로운 개혁의 기운이 도래할 것으로 본 기대감이 그것이었다.
사실 지난 50여 년간 우리 사회는 다양성을 잃은 채 살아왔다. 북쪽에 대한민국을 멸망시키려는 세력이 엄존하고 100만명의 군대가 대치하는 휴전선을 코 앞에 두고 있는 나라로서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주류사회는 그들과 생각이나 사상이 다른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고 가차없이 사회의 테두리 밖으로 밀어냈다. 체제수호의 명분 아래 그리고 경제발전에 힘입어 권력의 장기화가 이어졌고 권력의 장기화를 위해 반대세력을 물리적으로 봉쇄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해자를 양산했다.
그런 의미에서 2003년 노무현 정권이 출범하자 사람들이 과거 다양성을 몰각한 ‘일방통행 정치’가 막을 내리고 이제 ‘보통사람의 정치’가 시작되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역사적 진행과정의 순리(順理)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히도 그런 기대는 어긋났다. 특별히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하나 둘씩 그 기대를 접기 시작했다. 비록 서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상이할지라도 노 정권이 무엇인가 과거와는 다른,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고 싶은 심정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그토록 부족했던 다양성의 덕목을 키워나가는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거사 정리, 민족과 자주 내세우기, “반미면 어때”, 심지어 북한 비위 맞추기의 분위기와 안보불안감도 ‘나와는 다른 어떤 논리’, ‘과거의 고정관념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시각’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억지로라도 수긍해보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기대는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엊그제 청와대 문 앞에서 여지없이 입증됐다. 노 대통령의 단면, 아니 어쩌면 모든 것이 드러난 한 작은 사건이었다. 그는 청와대정문 앞 경복궁 신무문 개방행사에서 그것도 초등학교 학생들을 앞에 놓고 대통령으로서의 격(格)과 품(品), 지도층으로서의 덕(德)과 성(性)을 의심케 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어린이 손님을 상대로 얘기하겠다”고 전제하고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받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단절은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고 (그래서) 따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게 오래가면 권력을 가진 사람은 잘 살겠지만 일반 국민은 살기가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초등학생이고 일반 사람이고를 구분할 능력이 없는 것일까? 그에게는 옛 궁궐의 어느 문 하나를 열고 안 열고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소통을 상징하는 큰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에게는 대통령은 권력이 있고 어린 학생을 포함해 일반 국민은 권력이 없는 층이라는 수준의 의식밖에 없는 것일까? 그리고 그에게는 그런 지배와 피지배, 권력자와 국민이라는 구도를 굳이 양극화해서 초등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할 만큼 어떤 절박한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온 세상을 이분법(二分法)적으로 보는 그로서는 크게 어긋나는 언급이 아닐 것이다. 편가르기의 달인(達人)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 사물을 있는 자와 없는 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서울대 나온 자와 아닌 자, 강남 사는 사람과 아닌 사람, 과거 권위주의 시대 가해자와 피해자, 강대국과 약소국 등으로 파악하는 그에게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언급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과거 정권과 조금도 차이없는 몰(沒)다양성에 몰입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교(?)를 들은 초등학생들은 대통령의 말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했을까? 혹시나 이 세상에는 지배하는 사람이 있고 지배받는 사람 따로 있다는 계급적 사고의 실마리를 처음 제공 받은 것은 아닐까? 혹시나 대통령과 모든 공직자는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뽑혀 일하는 사람이고 그 주인은 국민이라고 가르쳐준 학교선생님의 말이 말짱 거짓말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대통령을 가진 이 나라는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고 부끄러운 세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