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일자 오피니언면 '동아광장'란에 정옥자 서울대 사학과 교수가 쓴 '역사 드라마의 쇼비니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바야흐로 우리는 역사드라마의 전성시대에 살고 있다. 한국 고대의 영웅을 주제로 한 고대사 드라마가 방송 3사를 완전히 장악했다. MBC의 ‘주몽’과 SBS의 ‘연개소문’이 전파를 타고 있고 곧 KBS의 ‘대조영’이 등장한다는 예고다. 고대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기쁜 현상에 대해 역사학자로서 일말의 우려가 앞서는 것은 드라마가 담고 있는 메시지의 위험성 때문일 터이다.

    학생들과 강의실 밖에서 잡담할 때 오히려 귀에 반짝 들어오는 말이 있는데, 오래전 한 학생이 “고대사 강의를 듣고 있노라면 무협지를 읽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라는 말을 한 것이 기억된다. 특히 어릴 때 놀이였던 땅따먹기 같은 영토팽창주의도 그런 느낌을 더한다고 했다.

    사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삼국시대 이전의 시기는 통일국가로 가는 이행기로서 삼국 사이의 경쟁은 물론이려니와 중원에 이미 통일국가를 세우고 앞서가는 중국과의 투쟁의 시대이자 패권의 시대임에 틀림없다. 이는 근대 이후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와 꼭 닮아 있어서 양자의 동질성을 확인하게 된다. 한마디로 고대와 근·현대는 패권의 시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지금 불고 있는 역사드라마 열풍은 우선 영화 ‘왕의 남자’의 성공에서 시작된 역사 영상물에 거는 기대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왕의 남자’는 실록에 나오는 광대 공길에 대한 단 한 줄의 기록을 바탕으로 연산군의 놀이 탐닉과 남색 성향이라는 역사적 개연성을 살려 거의 대부분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포장한 팩션(faction=fact+fiction)을 만들어 냈다.

    이제 역사 영상물은 실증된 역사적 사실 위에 상상력에 의한 허구를 입히는 것이라는 작업 형태를 뛰어넘었다. 역사적 사실의 실증보다 역사적 개연성을 얼마나 살리느냐가 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사실(fact)이냐 허구(fiction)냐를 따지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한 단계로 가고 있다.

    자료의 부족으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실증이 어려운 고대사를 드라마로 만드는 작업은 어쩌면 무한한 상상력을 가동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일 수가 있을 것이다.

    지금 진행 중인 고대사의 영웅을 주제로 한 역사드라마는 구체적으로는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들은 모두 호전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어떤 때는 그날 방영분의 거의 전부가 전쟁 아니면 칼싸움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도 있다.

    ‘만주는 우리 땅’이라는 공통분모 위에서 그 땅을 호령하던 영웅의 무용담을 펼쳐 보임으로써 한반도 내에서조차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우리의 답답한 현실에서 시청자에게 심리적 탈출구를 열어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 드라마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기초는 ‘민족주의’이다. 즉 우리 민족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애국심을 자극하고 있다. 민족주의는 제국주의가 존재하는 한 유효하지만, 자칫하면 쇼비니즘으로 전락할 수 있는 함정도 갖고 있다.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는 투쟁성과 배타성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연개소문’에서는 고구려가 현재 중국이 강행하고 있는 동북공정의 원조격인 작업을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고구려의 쇼비니즘을 주장하는 ‘신집’이라는 역사서를 만들어 교과서로 채택하였다는 것이다. 이 책은 책이름만 확인될 뿐 남아 있지 않아서 내용을 알 수 없다. 이는 현재 진행 중인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을 정당화하는 행위가 된다.

    역사는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역사 영상물이 역사적 사실 고증에서 자유로워지면 자유로워질수록 거기 담아내는 이데올로기나 메시지는 더욱 전진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책무는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평화의 시대를 열어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패권주의와 영토팽창주의, 호전성을 넘어 평화주의, 휴머니즘, 조화의 미학 등 평화를 위한 역사드라마가 호응받을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