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상돈 중앙대 법학과 교수가 쓴 시론 '좌파가 위기에 처했다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뉴레프트 진영의 교수들이 노무현 정권의 실패로 진보 세력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해서 주목을 받았다. “깊은 성찰과 획기적 전환이 없다면 진보개혁 세력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이제는 진보학자들마저 노 정부를 버리는구나 하고 냉소의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위기에 처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노 정부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보의 강령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대성공을 이루어 냈다. 불과 몇 년 만에 한미동맹은 붕괴될 지경에 이르렀고, 국가보안법은 껍데기만 남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세계로부터 지탄을 받는 김정일 정권을 감싸기에 여념이 없더니, 이제는 친북반미를 공공연하게 선동하는 단체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5·31지방선거는 대다수 국민이 노 정부의 이런 정책을 지지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고, 그런 이유로 진보 세력이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진보 세력은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사회 기저에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 노 정부는 바다 위에 드러난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수면 아래 자리 잡은 좌파 세력은 온전하다는 말이다. 사실 5·31지방선거에서 심판받은 것은 수면 아래의 빙산이 아니라 수면 위에 나와 있는 부분이다. 1980년대에 성장한 운동권이 도서출판, 영화 등 문화계의 많은 부분을 장악했으며,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조직화된 진보 세력은 젊은 세대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대학가에서 폭력 시위는 거의 사라졌다지만 진보 세력은 대학의 교양과목, 학생회가 주관하는 교양강좌 등을 소문 없이 장악해 나가고 있다. 정상적 사고(思考)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영화가 엄청난 관객을 모으고, 좌파 도서는 학생 참고 도서로 둔갑해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으니, 좌파가 ‘문화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권을 한번쯤 잃어버려도 버텨 낼 만한 체력을 구축한 한국의 진보좌파가 노 정권을 실패로 규정하는 것은 새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정지 작업일 것이다. 반면 한국의 보수 세력은 체력을 거의 소진해 가고 있으며, 이렇다 할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권 반대에 앞장서는 전통 안보 세력은 노무현 이후의 한국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개혁적 보수’ 등을 표방하는 중도 세력은 진보 어젠다를 상당 부분 수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희석시키고 있다. 사회의 하부 기반을 상실한 보수가 이처럼 혼란을 겪고 있다면 정권 창출은 쉽지 않을 것이다.

    노 정권 규탄에 주력하는 보수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처칠의 보수당이 1945년 총선에서 실패한 데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전쟁이 끝나자 영국인들은 전후의 미래에 대해 비전을 제시한 노동당을 지지한 것이다. 영국의 경험은 보수정권이 진보정책을 답습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1951년 총선으로 다시 집권한 보수당은 산업 국유화 등 좌파 정책을 그대로 계승해서 고질적인 ‘영국병(病)’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역사는 보수주의에 충실한 지도자들이 세상을 바로잡았음을 보여 준다. 1975년 영국 보수당은 당내 우파인 마거릿 대처를 대표로 선출해서 1979년 선거에서 승리했다. 19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중도 성향의 제럴드 포드 대통령을 후보로 내세워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배한 공화당은 1980년엔 원칙적 보수주의자인 로널드 레이건을 내세워 정권을 장악했다. 레이건과 대처는 자기들의 조국이 세계를 주도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비관론을 배척하고, 국가적 영광을 다시 찾겠다고 약속했다.

    좌파와 공산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세상을 해방시키겠다는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던 레이건과 대처는 자유민주주의의 적과 맞서 싸웠다. 대처와 레이건의 실험은 성공했고, 그래서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주의가 시대를 초월하는 가치임을 알게 됐다. 한국의 보수가 진정으로 노무현 이후 시대를 주도하고 싶다면 좌파의 함정과 같은 중도를 지향하기보다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고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