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서울대 초빙교수로 있는 박성조·베를린자유대 교수가 기고한 <'동족(同族)히스테리' 를 버려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이에 이은 유엔 안보리의 북한제재 만장일치결의는 우리의 통일정책에 대한 재음미를 촉구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반도의 통일은 동족끼리만 뭉치면 되는 것이 아니고 동맹·우방국가의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우리의 통일정책의 밑바탕에는 막연한 민족·동족개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민족의 역사적(우연적)인 동질성만 강조하지 ‘현재·미래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관을 공유하면서 같이 살겠다’는 공감대는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많은 민족·동족개념이 남북한에서 난무하고 있다. 남한의 햇볕론자들은 같은 민족으로서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북한’을 무조건 도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언젠가 민족 통일을 자연적으로 이루는 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반 북한인들의 ‘민족’ 개념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최근 남한을 넘나드는 북한 최고 간부들의 생각은 북한은 ‘동족’이기 때문에 남한사람들을 선군정치로 보호해주고 있으며, 남한이 ‘불바다’가 되지 않도록 하는 구세주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북한만이 민족의 정체성을 독점하고 있으며, 남한은 북한 덕분에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남북한 ‘동족 히스테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남한은 북한에 대한 ‘동족애’에 휘말려 모든 이성적 판단과 결정을 못하는 코마(혼수)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인권문제와 법치주의를 중시하지 않기 시작했다. 북한은 어린 사람들을 납치하여 강제 결혼을 시키고, 정신적 세뇌를 통해 수령님의 덕택으로 행복하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화폐를 위조한다. 또한 미사일을 쏘아 이웃을 위협한다. 이런 북한에 함구하는 남한의 ‘동족애’가 한심하기만 하다. 대체 누가, 언제, 우리들에게 이러한 ‘같은 민족’과 합쳐야 한다고 했는가? 절대적 가치관을 공유하지 않는 민족을 어떻게 같은 민족이라 볼 수 있으며, 무엇을 바탕으로 합칠 수 있겠는가. 단지 ‘피와 역사적 경험’이 같다고 해서 합해야 한다면, 이 세상은 통합을 위한 전쟁터가 될 것이다. 쿠르드족의 사례를 보라. 지금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합해지는 ‘통합’의 시대이다. 이성을 떠난 통일이나 통합은 있을 수 없고, 기대할 수도 없다.

    세계사를 되짚어보면 겉으로는 ‘민족’을 내걸고 속으로는 민족을 무시하고, 괴롭히고, 함정에 빠뜨린 인물이 너무나 많다. 히틀러, 무솔리니, 도조 등의 파시스트, 티토, 밀로셰비치, 차우셰스쿠, 호네커, 카스트로 등의 공산주의자가 그들이다. 극우와 극좌는 ‘민족’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그 ‘민족’, 즉 국민들을 이성 없는 맹종자로 전락시켰다. 히틀러는 민족의 이름으로 타민족을 침략하여 2차대전을 일으켰다.

    지금 김정일은 민족의 이름 아래 북한 사람들을 몽땅 ‘생지옥’에 집어넣고, 남한 사람들까지 좌지우지하려 한다. 사실상 ‘민족’이란 개념은 항상 치러지는 국민투표 같은 것으로 시대 환경과 국민의 욕구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오직 김정일 한 사람의 의지에 따라 불변하는 ‘민족 개념’을 고수하는 것은 허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름없다. 우리들은 ‘민족’ ‘동족’이라는 허상의 명목 아래서 정치 목적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정치가들의 게임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리의 우방 국가들이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통일정책을 짜야 한다. 우방국가의 도움으로 이뤄진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