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7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창균 논설위원이 쓴 '패배의 미학 즐기는 대통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2000년 4월 총선 때 노무현 민주당의원은 자기 지역구인 서울 종로 대신 부산 북·강서을에 출마했다. 결과는 한나라당 후보에 1만3000표 뒤진 완패였다. 1990년 3당합당 이후 지역구도를 거스른 세 차례 부산출마에서 모두 패배한 것이다. 노 의원은 가족 모임에서 “또 한번 쌍코피 터졌다”고 했다. 자신의 홈페이지엔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느냐. 이 나라와 부산을 사랑한다”고 썼다.

    선거 다음날부터 노 의원 홈페이지엔 하루 500개씩 격려 글이 올라왔다. “노무현님 힘내세요”, “당신은 아름다운 패자(敗者)입니다”…. ‘지역구도에 맞서 싸우다 쓰러졌다’는 콘셉트가 어필한 것이다.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이 생긴 것도 이때다. 정치인 노무현에게 2000년 총선패배가 없었으면 2002년 대선승리도 없었을 것이다.

    5·31지방선거 후 노무현 대통령은 “한 두 번 선거에서 졌다고 역사의 흐름이 바뀌지 않는다. 옳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선거에서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선거에 졌다고 역사 속에서 역할이 틀린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어쩐지 2000년 부산선거에서 패배한 노무현 의원의 소감을 다시 듣는 기분이다.

    그렇다면 6년 전 지역구도 대신 이번엔 무엇에 맞서 싸웠다는 말일까. 대통령은 “캐나다 보수당은 소비세를 도입했다가 선거참패를 당했다. 소비세 도입은 불가피했지만 당시 캐나다 국민의식 수준이 받아들이지 못했다”고 했다.

    대통령은 자신이 제기했던 증세(增稅)론 때문에 지방선거에서 졌다고 해석한다는 얘기다. 과거엔 부산 유권자들이 지역구도를 뛰어넘지 못해 자신을 낙선시켰고, 이번엔 전체 유권자들이 증세의 불가피성을 이해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거에 연연하지 않고 증세 주장을 펴다 패배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부터 잘못돼 있다. 대통령은 당초 인기가 없을 것을 알면서도 이를 각오하고 증세론을 꺼냈던 게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에서 “상위 20%가 세금의 90%를 내기 때문에 세금을 올려도 나머지 국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최상위 계층이 아닌 80% 국민은 증세를 반길 것으로 예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반응이 싸늘하자 지방선거 때까지 증세관련 함구(緘口)령을 내렸다. 2월 초 증세계획을 담은 재경부 문건이 언론에 유출되자 책임자를 보직해임하는 중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선거 앞두고 몇달 동안 증세에 대해 입도 뻥긋 못하게 했다가 이제 와서 증세 논쟁으로 정면 승부를 벌이다 선거를 망친 것처럼 설명을 하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올해 초엔 조선 개국공신인 정도전 얘기를 많이 했다. “정도전은 현실에선 이방원(태종)에게 패배했지만 조선 500년의 제도, 문화, 이념 틀을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정도전을 현실정치에서 패배했던 ‘역사속 승자’로 규정하고 대통령 자신도 그런 인물로 기억되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대통령은 정권 출범 무렵만 해도 링컨 미 대통령, 드골 프랑스 대통령같이 역경을 딛고 현실정치에서 승리했던 사람들을 닮고 싶은 인물로 꼽았었다. 이젠 현실정치 속 패배자 중에서 롤 모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현실정치 속 약자(弱者)는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됐다. 대통령 임기 중 여당이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얻은 것도 노 대통령이 유일하다. 이렇게 좋은 여건을 제대로 활용 못하고 역사 뒤집기, 강남 때리기, 양극화 장사 같은 엉뚱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다가 유권자의 심판을 받은 것이다. 그런 선거 결과를 놓고 뒤늦게 ‘패배의 미학’을 끌어내려 한들 국민도 역사도 수긍할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