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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심지연 경남대 정외과 교수(정치학 전공)이 쓴 칼럼 <'북풍'의 정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남북 관계가 개선돼 한반도가 통일되는 것을 마다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겠지만, 기이하게도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당국자들이 이에 대한 논의를 무성하게 제기하다 보니 온갖 억측이 나오고 있다. "북한에 많은 양보를 하려 한다"거나 "남북 철도 시험운행 합의" "정상회담 연내 개최 바람직" 등의 발표가 남북 관계 개선을 지향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선거를 앞두고 나온 것이기에, 그리고 과거에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적지 않았기에 '북풍(北風)'이라는 정치적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북풍'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로는 7.4 공동성명을 들 수 있다. 1972년 5월 3일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 수상은 조국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한다면 공동성명 발표는 남한 당국에서 토론하고 남북이 합의한 다음 하면 될 것이라고 말해 발표 시기를 남한에 일임하다시피 한 바 있었다. 그 결과 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성명이 동시에 발표된 것인데, 성명이 발표된 지 불과 3개월 만에 영구집권을 위한 비상조치를 취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온 국민의 기대를 악용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10월 유신을 마지막으로, 당국자의 의도나 바람과는 반대로 '북풍'은 더 이상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는 총선 사흘 전인 2000년 4월 10일에 있었던 남북 정상회담 발표였다.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은 총선 일정이 감안되었느냐는 질문에 "북측은 남측이 총선을 앞두고 빨리 하려는 것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총선을 감안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북한도 양해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북측이 총선과 관련해 시기를 물어오기에 '북한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 철학'이라고 잘라 말했다"고 했으나, 이 말 자체가 정략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국민은 생각했다. 이는 민주당이 한나라당에 115 대 133으로 패배한 총선 결과만 보더라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런 생각은 남한 유권자들뿐만 아니라 북한 당국도 갖고 있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단적인 예로 2000년 4월 11일자 노동신문은 1면에 "김대중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12일부터 14일까지 평양을 방문한다"고 보도하면서도, 5면에 "남조선의 썩어빠진 반인민적 '선거'제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당인 '민주당' 패거리들이 저들의 '압도적 당선'을 이루어 보려고 발악적으로 나오고 있다"고 비난했다. 발표 시기를 합의해 주고도 남북 관계의 정략적 이용을 지적한 것이다. 이를 볼 때 한민족 전체가 다 아는 것을 남한 당국자들만 모르거나, 모르는 체하는 것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방북이나 철도 연결 시험운행과 같은 사안들이 당국의 설명이나 기대와 달리 빛이 바래고 논란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역대 정권이 남북 관계를 정략적으로 활용한 데 따른 업보(業報)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그러한 의도가 전혀 없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정치환경 때문인데, 이 같은 양상이 지속되는 한 남북 관계의 건전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이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임하는 협상이기에 정상적인 절차와 관례가 무시돼 국민의 대다수가 외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정권 당국은 남북 관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민의 정치의식 성장으로 남북 문제의 정략적 활용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며, 방북 당사자인 김 전 대통령도 그러한 논란에 휩쓸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의 불신은 '북풍' 덕분에 철옹성과 같았던 유신체제마저 무너뜨린 전례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